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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소리'에 해당되는 글 15건

  1. 2017.02.16 미국 역대대통령
  2. 2017.02.16 조선의 역대 국왕
  3. 2017.02.16 애드센스 승인받는법 이랍니다.
  4. 2017.02.16 여자의 심리
  5. 2017.02.16 생명이랑 무엇인가
  6. 2017.02.16 정의란 무엇인가
  7. 2017.02.16 박근혜는 누구인가
  8. 2017.02.16 애드센스 승인되기 힘들다.
  9. 2017.01.23 힘이되는 100가지 명언 모음
  10. 2017.01.23 과일과 야채를 신선하게 유지하는 방법 18가지

미국 역대대통령

|


1
 
조지 워싱턴
(George Washington)
 
1789
~
1797
 
무소속
 
버지니아
 
초대 대통령
 미국 독립의 아버지
 

2
 
존 애덤스
(John Adams)
 
1797
~
1801
 
연방당
 
매사추세츠
 
초대 부통령
백악관 건축
 

3
 
토머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
 
1801
~
1809
 
민주공화당
 
버지니아*
 
루이지애나 매입
 

4
 
제임스 매디슨
(James Madison)
 
1809
~
1817
 
민주공화당
 
버지니아
 
미영전쟁
 미헌법
 

5
 
제임스 먼로
(James Monroe)
 
1817
~
1825
 
민주공화당
 
버지니아*
 
먼로 독트린
 

6
 
존 퀸시 애덤스
(John Quincy Adams)
 
1825
~
1829
 
민주공화당
 
매사추세츠
 
"건국의 아버지들" 이후 최초 세대
존 애덤스의 아들
 미국 대통령 최초로 사진 촬영
 

7
 
앤드루 잭슨
(Andrew Jackson)
 
1829
~
1837
 
민주당
 
사우스 캐롤라이나[1]
 
투표 권한 확대[2]
첫 서민 출신 대통령
13번의 결투
 

8
 
마틴 밴 뷰런
(Martin Van Buren)
 
1837
~
1841
 
민주당
 
뉴욕*[3]
 
부통령 역임 후 대통령 재임
 

9
 
윌리엄 해리슨
(William Henry Harrison)
 
1841
 
휘그당
 
버지니아[4]
 
병사
최단기 재임
 

10
 
존 타일러
(John Tyler Jr.)
 
1841
~
1845
 
휘그당
 
버지니아*
 
최초의 승계 대통령
가장 많은 자녀를 둔 대통령
 

11
 
제임스 포크
(James Knox Polk)
 
1845
~
1849
 
민주당
 
노스 캐롤라이나[5]
 
멕시코 전쟁,
서부시대 개막
 

12
 
재커리 테일러
(Zacharly Taylor)[6]
 
1849
~
1850
 
휘그당
 
버지니아
 
병사
 

13
 
밀러드 필모어
(Millard Fillmore)
 
1850
~
1853
 
휘그당
 
뉴욕[7]
 
승계
 

14
 
프랭클린 피어스
(Franklin Pierce)
 
1853
~
1857
 
민주당
 
뉴햄프셔
 
최초의 19세기 출생 대통령
 

15
 
제임스 뷰캐넌
(James Buchanan)
 
1857
~
1861
 
민주당
 
펜실베니아
 
유일한 미혼남
18세기에 테어난 마지막 대통령
 

16
 
에이브러햄 링컨
(Abraham Lincoln)
 
1861
~
1865
 
공화당
 
켄터키
 
최장신, 노예해방,
남북전쟁,
최초로 암살된 대통령
 

17
 
앤드루 존슨
(Andrew Johnson)
 
1865
~
1869
 
민주당[8]
 
노스 캐롤라이나[9]
 
승계,
최초로 탄핵시도 당함.
 

18
 
율리시스 S. 그랜트
(Ulysses Simpson Grant)
 
1869
~
1877
 
공화당
 
오하이오
 
남북전쟁
북군 총사령관
 

19
 
러더퍼드 B. 헤이스
(Rutherford Birchard Hayce)
 
1877
~
1881
 
공화당
 
오하이오*
 
새뮤얼 틸던
 보다 적은 표를 받고 당선
 

20
 
제임스 가필드
(James Abram Garfield)
 
1881
 
공화당
 
오하이오
 
피타고라스 정리 증명,
암살
 

21
 
체스터 아서
(Chester Alan Arthur)
 
1881
~
1885
 
공화당
 
버몬트
 
승계
 최초로 조선에서 사절단 접견
 

22
 
그로버 클리블랜드
(Stephen Grover Cleveland)
 
1885
~
1889
 
민주당
 
뉴저지[10]
 
한 번 건너 연임
조셉 퓰리처가 강력 지지
금본위제 옹호자
 

24
 
1893
~
 1897
 

23
 
벤저민 해리슨
(Benjamin Harrison VI)
 
1889
~
1893
 
공화당
 
오하이오[11]
 
윌리엄 해리슨의 손자
 

25
 
윌리엄 매킨리
(William McKinley)
 
1897
~
1901
 
공화당
 
오하이오*
 
서부농민들에 대한 동부기업인들의 승리
미국-스페인 전쟁
연임 후, 암살
 

26
 
시어도어 루스벨트
(Theodore Roosevelt)
 
1901
~
1909
 
공화당
 
뉴욕*
 
최연소, 최초의 승계 후 연임
 대기업 규제
 팽창적,개입적 대외정책
1번째 노벨 평화상 수상[12]
 

27
 
윌리엄 태프트
(William Howard Taft)
 
1909
~
1913
 
공화당
 
오하이오
 
가쓰라-태프트 밀약,
가장 거구인 인물
 

28
 
우드로 윌슨
(Thomas Woodrow Wilson)
 
1913
~
1921
 
민주당
 
버지니아[13]
 
제1차 세계대전,
민족자결주의,
국제연맹 주창
2번째 노벨 평화상 수상
 

29
 
워런 거메일리얼 하딩
(Warren Gamaliel Harding)
 
1921
~
1923
 
공화당
 
오하이오
 
워싱턴 회의,
측근 스캔들로 대통령 호감도 꼴찌,
재직중 병사
 

30
 
캘빈 쿨리지
(John Calvin Coolidge Jr.)
 
1923
~
1929
 
공화당
 
버몬트[14]
 
승계 후 연임
 

31
 
허버트 후버
(Herbert Clark Hoover)
 
1929
~
1933
 
공화당
 
아이오와[15]
 
대공황
 

32
 
프랭클린 D. 루스벨트
(Franklin Delano Roosevelt)
 
1933
~
1945
 
민주당
 
뉴욕*
 
뉴딜정책,
제2차 세계대전 및 태평양 전쟁,
유일무이한 4선,
독일 항복 전 뇌출혈로 사망,
역대 최장기 재임
 

33
 
해리 S. 트루먼
(Harry S. Truman)
 
1945
~
1953
 
민주당
 
미주리
 
일본에 핵공격,
승계 후 연임,
대한민국 정식 수교
한국전쟁
 

34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Dwight David Eisenhower)
 
1953
~
1961
 
공화당
 
텍사스
 
초대 NATO군 사령관
 최초의 민간인이 아닌 군인 대통령
19세기에 태어난 마지막 대통령
 

35
 
존 F. 케네디
(John Fitzgerald Kennedy)
 
1961
~
1963
 
민주당
 
매사추세츠
 
최연소 당선, 암살
뉴 프런티어 제창
 아이젠하워 이후 20세기 최초 첫번째 대통령
최초의 비 WASP 백인[16]
유일한 가톨릭 신자
 

36
 
린든 B. 존슨
(Lyndon Baines Johnson)
 
1963
~
1969
 
민주당
 
텍사스
 
승계 후 연임[17]
베트남 전쟁 참전 개시
달에 인류 착륙 성공
 

37
 
리처드 닉슨
(Richard Milhous Nixon)
 
1969
~
1974
 
공화당
 
캘리포니아[18]
 
아이젠하워의 부통령 출신
워터게이트 사건
하야한 유일한 대통령
 

38
 
제럴드 포드
(Gerald Rudolph Ford)
 
1974
~
1977
 
공화당
 
네브래스카
 
승계
 역대 대통령 중 최장수
 

39
 
지미 카터
(James Earl "Jimmy" Carter Jr.)
 
1977
~
1981
 
민주당
 
조지아*
 
3번째 노벨 평화상 수상자
 

40
 
로널드 레이건
(Ronald Wilson Reagan)
 
1981
~
1989
 
공화당
 
일리노이[19]
 
레이거노믹스,
이란 콘트라 사건,
최초의 연예인 출신 대통령
임기 끝난뒤에 치매 판정을 받은 대통령
 

41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George Herbert Walker Bush)
 
1989
~
1993
 
공화당
 
매사추세츠
 
걸프전
전임 부통령 출신[20]
 

42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
(William Jefferson "Bill" Clinton)
 
1993
~
2001
 
민주당
 
아칸소*
 
사상 3 번째로 젊은 대통령
 르윈스키 스캔들
 첫 베이비붐 세대 대통령
 

43
 
조지 워커 부시
(George Walker Bush)
 
2001
~
2009
 
공화당
 
코네티컷[21]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의 큰 아들
9.11 테러 & 테러와의 전쟁
 

44
 
버락 후세인 오바마
(Barack Hussein Obama)
 
2009
~
2017
 
민주당
 
하와이
 
최초의 흑인 대통령[22]
빌 클린턴 이후 8년 만의 정권교체
4번째 노벨 평화상 수상자
 

45
 
도널드 트럼프
(Donald John Trump)
 
2017
~

 
공화당
 
뉴욕
 
(앤드루 잭슨에 이은)
두번째 아웃사이더 대통령
 최초의 재벌 사업가 출신 대통령

 

======================

미국 대통령 선거
 간접 선거

모든 미국 국민은 자신이 속한 각 주의 대의원을 선출하며, 이를 흔히 "미국 대통령 선거"라고 부른다. 이렇게 선출된 각 주의 대의원들이 모여서 미국 대통령을 선출한다. 주가 아닌 지역은 선거인단 선출권이 없다.

50개 주 중에서 메인과 네브래스카를 뺀 48개 주는 승자독식(winner-take-all) 방식으로 선거인단을 선출하며, 승자가 그 주의 모든 선거인단을 갖는다. 메인과 네브래스카 주는 비례배분 방식(Proportional System)을 채택하고 있다. 주민 득표수에 따라 선거인단 수가 나뉜다.

전체 유권자의 직접투표 득표에서는 앞서면서도, 선거인단 수에서는 뒤져서 대통령에 선출되지 못한 경우가 미국 역사상 5번 있었다. 마지막의 경우가,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이다.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보다 약 21만표 앞섰으나, 선거인단 수에서 압도적으로 패하면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백악관행 티켓을 따냈다. 그 이전에는,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로서, 전체 국민의 직접투표에 의한 득표에서는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가 앞섰지만, 선거인단 수는 조지 W. 부시가 앞서서 부시가 대통령이 되었다. 1824년의 민주공화당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 1876년의 공화당 러더퍼드 B. 헤이스 대통령, 1888년의 공화당 벤저민 해리슨 대통령도 이러한 사례였다.

선거인단의 수는 각 주의 하원 의원과 상원 의원을 모두 합친 수이다. 상원 의원은 각 주당 2명이고, 하원 의원은 인구가 많을수록 많다. 예컨대 캘리포니아 주의 선거인단은 55명이지만, 버몬트 주, 알래스카 주, 델라웨어 주, 몬태나 주, 와이오밍 주, 노스다코타 주, 사우스다코타 주는 3명이다. 435명의 하원 의원과 100명의 상원 의원, 그리고 워싱턴 D.C.에 있는 3명의 선거인단까지 합해 모두 538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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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대 국왕

|

 

조선의 국왕

1 태조 太祖 강헌 康獻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 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성계 成桂 건원릉 健元陵 1392년~13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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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제(高皇帝)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 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 단[4] 旦
2 정종 定宗 공정 恭靖 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
(공정대왕)[5] 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
(恭靖大王) 방과 芳果 후릉 厚陵 1398년~1400년 영안대군(永安大君)
경[4] 曔
3 태종 太宗 공정 恭定 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 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 방원 芳遠 헌릉 獻陵 1400년~1418년 정안대군(靖安大君)
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 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4 세종 世宗 장헌 莊憲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도 祹 영릉 英陵 1418년~1450년
 충녕대군(忠寧大君)
5 문종 文宗 공순 恭順 흠명인숙광문성효대왕 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 향 珦 현릉 顯陵 1450년~1452년 
6 단종 端宗 - -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 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郭孝大王 홍위 弘暐 장릉 莊陵 1452년~1455년

Danjong.jpg
노산군(魯山君)
노산대군(魯山大君)
7 세조 世祖 혜장 惠莊 열문영무신성인효대왕 烈文英武神聖仁孝大王 유 瑈 광릉 光陵 1455년~1468년

Joeseon Sejo01.jpg
진평대군(晉平大君)
함평대군(咸平大君)
진양대군(晉陽大君)
수양대군(首陽大君)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륭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 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8 예종 睿宗 양도 襄悼 흠문성무의인소효대왕 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 황 晄 창릉 昌陵 1468년~1469년 해양대군(海陽大君)
9 성종 成宗 강정 康靖 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 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 혈 娎 선릉 宣陵 1469년~1494년 자을산군(者乙山君)
잘산군(乽山君)
10 - - - -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 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 융 㦕 - - 1494년~1506년 연산군(燕山君)
11 중종 中宗 공희 恭僖 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 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 역 懌 정릉 靖陵 1506년~1544년 진성대군(晉城大君)
12 인종 仁宗 영정 榮靖 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 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 호 峼 효릉 孝陵 1544년~1545년 
13 명종 明宗 공헌 恭憲 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 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 환 峘 강릉 康陵 1545년~1567년 경원대군(慶源大君)
14 선종 宣宗 소경 昭敬 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 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균 鈞 목릉 穆陵 1567년~1608년 하성군(河城君)
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 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연[4] 昖
선조 宣祖 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륭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 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15 - - - -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 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 혼 琿   1608년~1623년 광해군(光海君)
16 열조 烈祖 장목 莊穆 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 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종 倧 장릉 長陵 1623년~1649년 능양도정(綾陽都正)
능양군(綾陽君)
능양대군(綾陽大君)
인조 仁祖 개천조운정기선덕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 開天肇運正紀宣德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17 효종 孝宗 충선 忠宣 선문장무신성현인대왕 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 호 淏 영릉 寧陵 1649년~1659년 봉림대군(鳳林大君)
흠천달도광의홍렬선문장무신성현인명의정덕대왕 欽天達道光毅弘烈宣文章武神聖顯仁明義正德大王
18 현종 顯宗 장각 莊恪 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 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 연 棩 숭릉 崇陵 1659년~1674년 
소휴연경돈덕수성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 昭休衍慶敦德綏成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
19 숙종 肅宗 희순 僖順 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 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순[6] 焞 명릉 明陵 1674년~1720년 조선 숙종.PNG
현의광륜예성영렬유모영운홍인준덕배천합도계휴독경정중협극신의대훈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 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配天合道啓休篤慶正中恊極神毅大勳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20 경종 景宗 각공 恪恭 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 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 균[7] 昀 의릉 懿陵 1720년~1724년 
21 영종 英宗 장순 莊順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 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 금 昑 원릉 元陵 1724년~17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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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잉군(延礽君)
영조 英祖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 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
22 정종 正宗 공선 恭宣 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 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 산[8] 祘 건릉 健陵 1776년~1800년 King JeongJo of Joseon.jpg
 선황제(宣皇帝)
정조 正祖 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 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
23 순종 純宗 선각 宣恪 연덕현도경인순희문안무정헌경성효대왕 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 공 玜 인릉 仁陵 1800년~18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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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황제(肅皇帝)
순조 純祖 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소륜희화준렬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건공유범문안무정영경성효숙황제 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文安武靖英敬成孝肅皇帝
24 헌종 憲宗 장숙 莊肅 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 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 환 奐 경릉 景陵 1834년~1849년 朝鲜宪宗.jpg
 성황제(成皇帝)
체건계극중정광대지성광덕홍운장화경문위무명인철효성황제 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經文緯武明仁哲孝成皇帝
25 철종 哲宗 충경 忠敬 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 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 원범 元範 예릉 睿陵 1849년~18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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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령
 덕완군(德完君)
장황제(章皇帝)
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 熙倫正極粹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文顯武成獻仁英孝章皇帝 변[4] 昪
26 고종 高宗 - -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 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 재황 載晃 홍릉 洪陵 1863년~18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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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성군(翼成君)
태황제(太皇帝)
광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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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애드센스 승인받는법 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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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센스 승인 받는법 노하우 한눈에보기]

1. 승인용 블로그를 하나 만들어서 글만 5~7천자가 넘도록 게시글을 작성해준다.

2. 게시글을 한 7개 정도 작성했으면 바로 애드센스 1차 신청을 넣는다.

3. 기다리는동안 하루 1~2개씩 포스팅을 하고 이때도 텍스트수는 7천자가넘으면 좋다.

4. 만약 콘텐츠 불충분으로 거절이온다면 9천자가 넘는 글을 긁어와 2개정도 포스팅후 신청한다.

5. 그동안 본진 블로그는 텍스트수와 사진갯수와 상관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본인스타일대로 글을 작성하며

블로그를 키운다.

6. 승인용 블로그가 애드센스 최종승인이 나면, 애드센스 관리메뉴에 들어가 본진 블로그 주소를 추가하여

광고를 본진블로그에 달아주면된다.

(출처:http://llbllb3661.tistory.com/)


애드센스란?

애드센스는 구글이 운영하는 수익 배분 사업의 일환으로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수익 배분 사업을 쉽게 풀이하자면 광고 게재 사업 정도라고 보면 된다. 광고주들이 구글에게 광고를 의뢰하면 구글은 개인 사이트 및 블로그에 광고를 게시한다. 이로부터 구글이 일정 수익 이상을 받으면 고객에게 광고료를 지급하는 방식이다.


광고 게재는 광고주 모집 프로그램인 애드워즈(AdWords)와, 구글과 제휴를 맺은 다른 광고 사이트에서 한다. 구글 애드워즈에 참여하면 애드센스에 자신의 광고를 띄울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이러한 광고가 현재 많이 퍼져있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리그베다 위키, 엔하위키 미러가 이 애드센스 때문에 분쟁을 벌인 적이 있다.


일반 홈페이지, 블로그뿐 아니라 유튜브 등에서도 영상 재생 바에 노란색 줄이 있고 이 줄을 지날 때 광고가 뜨는데 이것도 다 구글 애드센스다. 영상 시작 전에 뜨는 광고도 마찬가지. 유튜브 조회수에 따라서 광고 노출시간을 측정해 유튜버에게 돈을 지급한다. 지급되는 금액은 1000뷰당 3.5달러.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


모바일용 애드몹(AdMob)도 있다.


3.1. 수익성[편집]


구글이 압도적인 점유율을 자랑하는 해외 사례와는 달리 한국은 네이버나 다음 등의 포털 사이트를 통해 개인 사이트나 블로그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포털 사이트마다 걸려 있는 광고 때문에 블로그 내의 광고 효과가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 화근이다.[3]


3.2. 설치 가능한 곳[편집]


블로그의 경우, 설치형 블로그나, 이글루스나 티스토리 같은 자유롭게 보장된 블로그에만 적용이 된다. 그런데 이글루스의 경우에도 약관상에 이런 광고를 다는 것은 불법이라고 명시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글루스에 광고를 다는 사람은 굉장히 많다.(...) 그러나 2014년부터 이글루스도 애드센스 삽입을 위한 옵션이 제공되어 이후 많은 사용자들이 이용하는 중.


네이버 등의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되는 블로그의 경우에는 약관상으로 이익을 취하는 행위에 대해 금지하고 있다. 그러니깐 약관을 자세히 읽어야 하는 것이다.(...) 대신 네이버 블로그는 구글 애드센스와 비슷한 네이버 애드포스트를 제공하고, 다음 블로그는 광고를 못 달지만 대신 광고를 자유롭게 달 수 있는 티스토리도 같이 운영한다. 애드센스에 대한 대안은 포털 블로그에도 있다는 것. 야후와 파란은 포털이 망하면서 사라졌으니 논외(...). 


블로그 형식이 아닌 사이트에도 당연히 게재할 수 있다. 원래 모든 홈페이지를 대상으로 하는 광고 게재 서비스인데 개인 홈페이지가 블로그로 대동단결하던 시절에 나와서 블로그 대상의 광고 게재 서비스로 인식이 된 것이다. 


3.3. 수익[편집]


우선 모든 수익은 미국 달러로 지급된다. 일부 국가에서는 해당 국가 통화로 바꿔주기도 하나 대한민국은 해당사항이 없다.


과거에는 한국 은행 계좌를 통하지 않고 수익금을 신청해도 수표로만 발급하며, 배송 기간만 몇 주씩 걸리고 이걸 은행에서 환전하려면 추심 수수료로 만원 넘는 돈을 내야 하는 등의 불편함이 있었다. 그러다가 2009년 여름에 웨스턴 유니온을 통한 지급이 개시되었는데, 이는 지급되자마자 바로 은행에서 환전할 수 있는 편리한 시스템 때문에 4년 넘게 애용되어 온 방식이었다. 이걸로 반사 이익을 알게 모르게 본 은행이 바로 기업은행이다.[4]


하지만 2014년 2월 갑자기 웨스턴 유니온 이용이 중단되고 직접 은행으로 송금받을 수 있게 지급 방식이 바뀌었는데, 방식 자체는 매우 편리하지만 문제는 중계 수수료와 수취 수수료. 중계 수수료야 구글에서 웨스턴 유니온 시절 애드센스 이용자들을 사실상 독점했던 기업은행을 비롯한 여러 은행들이 1만원+α의 수수료를 받는지라 관련 커뮤니티는 하나같이 멘붕에 빠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구세주는 있었으니, 바로 SC제일은행이다! 300달러 이하에 대해서는 모든 수수료가 면제. 어지간한 헤비 블로거가 아닌 이상 300달러를 초과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은지라, 애드센스 이용자들 상당수가 벌써부터 SC제일은행으로 달려가는 중.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은 환율 우대도 괜찮은 편이다. 발전산이 문제긴 하지만[참고로] 국민은행도 한 때 300달러 미만에 대해 수수료를 면제해줬으나 2016년부터 더 이상 수수료 면제를 해주지 않는다. 많이 써서 해주기 싫었나보다

극히 일부 돈 잘 버는 유투버들에게 한 가지 팁을 주자면 300달러를 초과할 경우에는 우체국 계좌로 받으면 된다. 수수료가 5,000원으로 저렴하기 때문.


대부분의 은행들은 애드센스 수익금이 입금되면 지점 직원이 직접 전화를 걸어서 확인을 시켜준다. 만약 원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전화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면 되는데 외화보통예금을 개설해서 이 계좌로 수령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입금해주니 참고.[6]


3.4. 지급보류가 떴을 때[편집]


구글 애드센스 초보자들은 계정 상태 확인을 하다가 지급보류가 경고 메시지로 뜨면 '아니? 내가 뭘 잘못했길래 갑자기 지급보류가 뜨지?'하고 당황하기 쉽다. 하지만 이건 수익이 인증 기준액인 10달러를 달성하면 나오는 것이다. 우선 지급 방식과 세금 정보를 업데이트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10달러를 달성한 시점으로부터 2~4주 정도 기다리면 우편물이 와 있을 것이다. 그 우편물에 적힌 PIN 번호를 보고 제대로 입력하기만 하면 인증이 성공적으로 끝난다.


주의할 점은 이 우편물이 미국에서 오기 때문에 따라서 애드센스 가입 시에 주소를 영문 주소로 정확히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안 그러면 우편물이 엉뚱한 데로 가거나 반송되어 이래저래 고생한다. 


하지만 2014년 말쯤부터는 굳이 영문 주소로 적을 필요가 없어졌다. 한국어로 설정해 놓으면 현지 주소로 입력하라고 하기 때문에 한글 주소로 입력해도 우편이 해당 주소로 날아온다!!


4. 광고 종류[편집]


4.1. 컨텐츠용(AFC)[편집]


간단히 말해서 배너형 광고. 리그베다 위키 시절 오른쪽에 뜨던 것과, 한때 나무위키 상단에 뜨던 것도 이 컨텐츠형 광고다. 텍스트, 이미지, 플래시(리치 미디어) 광고가 있는데, 구글 애드센스의 텍스트 광고는 이후 다른 텍스트 배너 광고의 표준이 되다시피 할 정도로 많이 알려졌다. 수직형, 수평형, 정사각형으로 나뉘고, 크기도 다양하게 제공되는 편이다. 특히 리더보드 형식인 728x90 사이즈와 수평형 스카이스크래퍼 형식인 160x600 사이즈는 다른 광고 서비스에서도 많이 따라할 정도로 대중화된 형식이다.


모바일 페이지 전용으로 가로 사이즈가 320픽셀 사이즈인 것도 지원하고, 모바일과 PC 해상도를 한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반응형 사이트를 위해서 해상도가 변하는 반응형 컨텐츠 광고도 지원한다. 배너 광고 이외에 링크 광고라는 것도 있는데, 이건 광고 배너에 짧은 키워드 링크만 제공하고, 이걸 클릭하면 광고 모음 페이지가 따로 열리는 방식이다. 광고 모음 페이지에서 광고를 클릭해야 수익이 가는 시스템이다. 


배너 광고는 구글이 광고주로 받는 광고료의 67%, 링크 광고는 51%를 받게 된다. 


페이지 하나당 배너 광고 3개, 링크 광고 3개까지 게재 가능하다. 3개를 넘어가게 되면 4개째의 광고부터는 출력이 되지 않는다. 2016년 10월 구글 정책 변경으로 페이지당 광고 갯수 제한이 사라졌다.


리치 미디어 광고는 구글의 플래시 퇴출 의지에 따라 점차 사라지고 있다. HTML5 같은 플래시 대체 기술로 나아갈 예정이다.


4.2. 검색용(AFS)[편집]


운영하는 사이트에 구글 맞춤검색창을 달고, 검색 결과에 광고를 표시하는 형식이다. 사이트의 모든 컨텐츠를 구글 검색봇이 긁어가게 만들어 놨다면 사이트 전체 검색과 비슷하게 동작한다. 즉, 사이트 전체검색 기능을 구글에 빌리고, 광고도 게재하는 것.


검색 횟수가 많을 경우 검색엔진 운영비를 수익에서 공제하기도 하는데, 절대로 검색 광고로 올린 수익을 초과해서 공제하지는 않으니 안심해도 된다.


4.3. 동영상용(AFV)[편집]


운영하는 사이트가 동영상을 게재하는 사이트일 경우, 동영상 플레이어 안에 이걸 달 수 있다. 유튜브에 삽입되는 광고와 비슷하게 동작한다. 비슷하게 유튜브 자체에서도 이 동영상용 광고를 달 수 있는데, 유튜브 파트너 프로그램을 신청해서 구글 애드센스 계정과 연동하면 된다.


4.4. 게임용(AFG)[편집]


플래시 게임 전용으로 나온 애드센스다. 플래시 게임 안에 넣을 수 있다. 동작 방식은 동영상용 애드센스와 동일.


4.5. 모바일 검색용(AFM)[편집]


피처폰 대상으로 하는 웹사이트 전용으로 나온 애드센스다. 피처폰에서는 자바스크립트 사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은 이걸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컨텐츠용에 있는 모바일용 광고단위를 사용하면 된다.


4.6. 기타[편집]


그 이외에 피드용과 도메인용이 있었는데, 2013년 현재 서비스가 중지되었다. 도메인용 광고는 유명 사이트와 비슷한 도메인을 사들여서 광고만 달아놓는 얌체짓 때문에 말이 많아서 폐지되었다는 소문이 있다.


5. 다른 회사의 유사 서비스[편집]


다음의 경우에는 이런 구글의 행동에 감동(?)을 받았는지 다음 애드클릭스를 개발하였다. 다음 블로그에서 애드클릭스를 넣을 수가 있었다. 달러가 아니고 원화로 지급하기 때문에 다소 메리트가 적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비스가 종료되었다. 안습. 하지만 다음은 다음 Ad@m, 애드클릭스라는 새로운 광고 시스템을 도입하여 운영 중이다. 짜증나는 전면광고를 제공하기 때문에 알음알음 입소문을 타는 중.

네이버도 네이버 애드포스트라는 애드센스와 비슷한 수익 시스템을 개발했다. 네이버 블로그에는 이 광고를 달 수 있고, 외부 사이트도 제휴 신청을 하면 달 수 있다. 미성년자는 가입할 수 없다.[사실] 여전히 베타 서비스다. 2014년 7월 1일에 네이버㈜에 합병될 예정. 다만 구글 애드센스처럼 페이지뷰 수익은 없는 거 같다.

리더스타임도 제법 유명한 편이다. 수익금 지급 하한선이 3만 원으로 낮은 편이고 네이버 블로그에도 넣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수익금을 지급받으려면 신분증을 스캔해서 보내줘야 한다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 하지만 리더스타임은 2015년 12월 13일 종료되었다.


그 이외에 국내에도 여러 사이트가 비슷한 서비스를 하는데, 단가가 애드센스보다 낮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런 광고를 이용하여 인기 검색어나 펌글 등으로만 블로그를 채우는 등의 각종 편법을 부리는 얌체 블로거들도 상당히 많으며, 이런 건 신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박멸 가능하다. 신고 들어오면 바로 애드센스 계약이 해지된다……고 하는데, 실제로 불법&불펌 자료만 존재하는 사이트를 10여 차례 신고해도 조치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구글 입장에선 광고만 끌어주면 부정 클릭만 아닌 이상 누구든 상관 없을 테고. 물론 실제 조치가 들어가는 경우가 가끔 있을 수도 있으니 펌글을 주로 올리는 블로거들은 조심하자.


6. 논란[편집]


구글 애드센스는 사실 사용자의 인터넷 쿠키를 추적해서 사용자에 맞춘 광고를 보여주는 형식이기 때문에 사용자의 웹 기록을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상당히 논란이 되는 점이 있다. 쇼핑몰이나 여행사 사이트에 들어갔다 나오면 쇼핑, 여행 관련 광고가, 해외여행 한번 갔다 오면 해외 사이트의 광고가 근 한 달 가까이 표시되는 게 바로 이 때문이다. 심한 경우 남한테 보여주기 껄끄러운 성인물 콘텐츠가 여과없이 뜨는 경우가 종종 있어 문제가 될 소지도 충분히 있다.


이런 부분 덕분에 웹 광고 등이 사용자의 웹 기록 등을 못 보게 하는 Do Not Track이라는 웹 표준 기술이 개발되었고 최신 브라우저는 이 기술을 다 지원하는 상황이다. 이 기술을 쓰면 웹 기록 추적형인 구글 애드센스가 떠야 될 자리가 아예 공백이 되어버린다는 걸 알 수 있다. 덧붙여 구글 크롬의 경우에는 인터넷 설정의 고급 설정으로 들어가 수동으로 켜줘야 한다. 정 귀찮으면 그냥 시크릿 모드 쓰자.


7. 애드센스 시작하기[편집]


애드센스로 수익을 거두려면, 우선 애드센스를 설치할 수 있는 홈페이지(설치형 블로그도 가능)가 필요하다.


구글 애드센스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조건을 확인하여야 한다.


웹마스터 품질 가이드라인을 준수할 것.

홈페이지가 충분한 컨텐츠를 담고 있을 것.

홈페이지에 애드센스 정책상 불허하는 내용을 담지 아니할 것.

위 3가지 조건 중 하나라도 만족하지 못하면 승인이 거절되고, 모두 만족된다면 가승인 상태가 된다. 가승인 상태에서는 광고 관리는 가능하나 새 광고 단위를 생성해서 광고 코드를 집어넣어도 광고가 떠야 할 자리에 투명한 네모가 생겨있다. 하지만 일단 투명광고(?)라도 띄워 놓고 기다려야만 비로소 정식 승인이 된다. 정식 승인이 통보된 후 기다리면 투명광고가 진짜 광고로 바뀐다. 이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7.1. 금지 행위[편집]


애드센스 계약자는 다음과 같은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되며, 적발 시 계정이 영구 정지된다.


본인의 애드센스 계약에 의해 본인의 사이트에 게재된 광고를 고의적으로 클릭하는 행위.[8][9]

본인의 사이트에 게재된 광고의 클릭을 권유하거나 유도하는 행위.[10]

허용되지 않는 방식(iframe 등)으로 광고를 제공하는 행위.

실적 조작 등 악의적인 목적으로 광고 소스를 무단 수정하는 행위.

정책상 허용되지 않는 사이트(음란, 폭력 사이트 등)에 광고를 게재하는 행위.[11]

사이트에 광고를 게재하면서 불펌 등 상습적으로 저작권 침해 자료를 게재하는 행위.[12]


타인이 악의적으로 일부러 여러 번 클릭해줘도 이게 부정 클릭으로 간주되어 계정이 비활성화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타인이 악의적으로 부정 클릭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하나 쉽지 않다. 그래서 애초에 아예 악의적인 부정 클릭을 막는 스크립트를 설치하는 경우가 많다. 마이센스나 제트센스와 같은 사이트가 있었으나 그 끝이 좋지 않았으며(...) 사실상 부정 클릭을 막는 데 별 효과가 없다.


두 번째의 '클릭 권유 및 유도행위'에서 주의할 점이 있는데, '플로팅 배너'라 하여 광고가 스크롤을 따라다니게 해 놓는 경우도 간접적인 클릭 권유행위로 비칠 수가 있어서 허용하지 않고 있다. 모 사이트에서는 애드센스 광고 배너를 플로팅 배너로, 그것도 본문의 일부를 덮을 수 있는 위치로 맞춰 놓고 X 버튼을 광고 배너 위에 놓아서 누르면 광고가 사라짐과 동시에 클릭이 되게끔 해 놓았다. 당연히 중대한 정책 위반으로 영구 정지를 당한다.


어떤 사용자는 그냥 플로팅 배너로만 해 놓았다가 정지를 먹었으나, 앞서 얘기한 사례처럼 악질적인 케이스가 아니었기에 구글에 사과문 보내고 데꿀멍하니까 정지가 풀렸다. 근데 다시 일반 배너로 바꿔서 정지 풀리고 나니까 실적이 급 저조해졌다 카더라. 이건 그동안 애드센스로 대박을 친 게 플로팅빨이었다는 불편한 진실.


물론 편법을 써서 부정 클릭 안 걸리고 클릭 수 높이는 방법도 있기는 하나, 이 경우 '스마트 프라이싱'에 걸려 광고 단가가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이거 걸리면 한동안은 수익이 쥐꼬리만 해지기 때문에 계정 블록을 제외하면 애드센스 게시자들이 호환 마마보다도 더 무서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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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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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기본심리



여성은 안기고 싶어 한다.
여자를 흔히 고양이과 동물에 비유한다. 부르면 달아나고,모르는 체 하면 다가선다. 여성이 상대방과 몸을 가까이 하는 것은 안기고 싶어하는 동물의 그 습성을 100% 이용하고 싶은 것이다. 이는 간단하게 말하면 '여성은 두뇌동물이 아니라 정서 동물이다'라는 것이다. 또한 여성에 대해서는 우렁찬 연설도 좋지만 오히려 소곤거리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여성은 속삭임에 약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도 여성의 안기고 싶은 속성 중의 하나이다.



여자는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한다.
여성은 일반적으로 철거하게 인색하며 조금이라도 이득을 보아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다. 여자들은 이득을 보고 싶다거나,손해를 보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상당한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좀처럼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여자는 잘 보이고 싶어한다.
여성들의 자기 과시욕과 허영심은 남성이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이다. 여성은 자기를 위해서 돈을 쓰기 보다 다른 사람이 보는 곳에 돈을 들이고 싶다는 여성 심리가 강하게 작용한다. 여성은 어떤 곳에서나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다거나,자심만이 두드러지고 싶다는 심리가 본능적으로 작용한다. 얼굴이 잘 생기고 못 생기고 관계없이 화장시간이 긴 것도 이러한 연유이다.



여자는 안전지대를 좋아한다.
여자가 소문을 좋아 하는 것은,안전한 장소에서 웃음과 눈물을 흘리는 쾌감을 원하기 때문이다. 여자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와 달라 항상 아기나 어린이들과 함께 있기를 좋아한다. 특히 여성지에 이혼기사를 자주 특종감으로 싣는 것은 여성독자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안심을 유도하며 이혼기사를 읽는 상대적 안심효과를 겨냥한 것이다.



여성은 변화를 좋아한다.(변화에 익숙하다)
기분전환을 한다면서 여성은 한 달에 한번 책상의 위치나 소품들을 바꾸고 싶어한다. 이것은 결코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다. 여성이 아무리 고학력의 소유자라 해도 이 경향이 바뀌지 않는다.



여성은 과거보다 미래를 좋아한다.
여성이라는 존재는 항상 미래형의 동물이다. 따라서 여성과 대화를 하거나 생각을 주고 받을 때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지향하는 형태를 지녀야 한다. 이야기할 때 프로야구를 화제로 삼아도 어제 게임보다는 오늘 게임을 화제로 삼아야 한다.



여자는 실패담 보다는 성공담을 좋아한다.
여자는 꿈을 먹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행복을 돈으로 살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은 호화로운 것이 행복하다고 믿고 있다. 여성은 호화로워 질수록 행복이 손에 들어온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이 얘기를 듣고 분개할 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이 바로 현대 여성들의 모습인 바에야 어찌하겠는가?



여성은 신체접촉을 통해 친밀해 진다.
여성은 직접 손으로 만져 본 것만 믿는 습성이 있다. 따라서 여자를 사로잡기 위해서는 손이나 몸으로 말해야 한다. 약국에서 약을 팔 때에 여자손님의 이마에 손을 대보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약을 먹 고 한숨 자면 곧 좋아 질 겁니다.'하고 말하면 안심하고 잔다. 또 실제로 그렇게 하면 신비스럽게도 열이 내려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여자는 남자 이상으로 잔혹해 질 때가 있다.
여자는 모질고 강하다. '여자는 강하다'라고 남성들이 특히 인상깊게 느끼는 것은 교통사고에서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 들어와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처리하는 간호사의 모습을 볼 때라고 한다.
여자는 생리적 현상으로 인해'피'라는 것에 익숙되어 있기 때문일까?



행동표출로 나타나는 여성기본심리



방어 본능이 강하다.
충분히 친밀하지 않은 관계에서 지나친 접근이나 신체적 접촉은 거부감과 방어본능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상대의 사적 공간을 함부로 침범하면 신뢰를 일을 수 있다. 역설적으로 보면 여성과의 거리를 좁힐수록 설득이나 협상에 성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여성과 사귀기를 원하면 거부감을 최소화하면서 친밀거리를 좁혀 나가는 기술이 요구된다.


사람의 친밀도에 따른 친밀거리(Body Zone)란? 
-근접공간(40~50㎝) : 상대방의 표정도 잘 알 수 있고 냄새 등 감각자극과 신체접촉이 가능.
-개인공간(50~120㎝) : 상대방과 닿을 수는 있지만 체취까지는 느껴지지 않는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거리.
-사회공간(2.7~6m) : 업무처리나 사교에 필요한 거리. 비즈니스 공간.
-공공공간(3.6m 이상) : 연설 등 대중에게 이야기하는 강연장.교실 같은 공간.


타인 의존형이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남성은 자립형,여성은 타인 의존형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 의존형이 강한 여성은 의존하고 싶은 사람에게 언제나 주목받고 싶어하며,배려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하다.



감정이 급격히 변한다.
안정되어 있지 못하고 불안한 상태에서는 감정이 급격히 변하기 마련이다. 여성은 비언어적인 의사전달,가령 몸짓이나 목소리의 높고 낮음,속도 등의 해석이 매우 뛰어나다.



참을성이 강하다.
여성의 참을성은 심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생리적인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많다. 어깨가 신체의 중심인 남자에 비해 엉덩이가 몸의 중심인 여자는 앉는 것에 익숙하다. 여성은 단조로운 일에 쉽게 적응할 수 있다. 



칭찬을 기다리고 있다.
남성의 자존심은 자기 완결적인 면이 있어서 남의 칭찬이 없더라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은 타인 의존적인 면이 강해서 구체적으로 칭찬을 해주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다. 여성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로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고 자존심을 지킨다. 아름다운 여성과 못생긴 여성을 함께 칭찬할 때는 그들의 지성을 칭찬해라.



태도가 명확하지 않다.
태도를 불분명하게 하는 것은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성 심리에 대한 일반적 이해



여성은 수다쟁이다.
원래 여성들은 다정다감하기때문에 이는 누구하고도 이야기 하기를 좋아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감정이나 생각을 어느 누구에겐가 털어놓지 않으면 답답증이 나서 못견딘다. 점잖은 신사숙녀의 나라 영국에도 일찍이 이런 격언이 있다.
" Woman’s hair is long her tongue is longer. " (여자는 머리칼 보다 말이 더 많다.)
남성들은 모름지기 여성들의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성을 움직이려면 가슴을 노크해라.
여성을 설득하고자 할 때는 그들의 머리에 호소해서는 별 효과가 없다. 어떤 당위성이나 논리성을 가지고 설득하기 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따뜻한 심장을 찾아가는 편이 났다. 여성들은 오감이 발달했기 때문에 사고나 행동이 매우 감정적이고 직관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계의 구조나 복잡한 숫자의 나열을 기피한다. 어떤 개관성이나 논리성의 틀에 놓고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자신의 감정이라는 틀에 놓고 자신의 눈으로 본다. '여자에게는 육감이 있다.'라는 말은 여성에게 있어서 감정은 무엇보다도 우선시된다. 이렇듯 이성보다 감정이 한발자국 앞서있기 때문에 때로는 남자들이 이해 못할 행동을 서슴없이 한다. 남자의 무드 조성여하에 따라 「NO」가 오후 늦게라도「YES」로 둔갑할 수 있다. 따라서 여성의 가슴, 즉 마음의 문을 조용히 노크해야 할 것이다.

여성은 질투의 화신이다.
질투(嫉妬)라는 한자에서 보면 계집녀(女)가 있어서 여성이 더 강렬하다고 하나 심리학적으로 보면 여성이나 남성이나 모두 비슷하다고 한다. 질투를 표현하는 방향이 남자와 여자에 따라 다르다. 가령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고 가정하면,아내의 질투의 화살은 다른 여자 즉 동성에게 집중된다. 반대의 경우 아내가 바람을 피우면 대게 남편은 아내를 질타하는 즉 이성에게 질투의 방향이 겨누어 진다.

여성은 연약하지만은 않다.
여성은 몸과 마음이 연약하다고 남성들은 생각한다. 그래서 남성처럼 취급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적당히 봐주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요즘 일부 여성들 중에는 남성들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힘든 일들을 당당히 소화해 내고 있다. 오히려 적당히 봐주는 것없이 사정없이 다루는 남성에게 호감을 사는 심리가 있다. -잘 봐! 이것이 터프가이라는 거야!-

여성은 나중에 칭찬해 주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사람은 자기에게 친절히 대해 주고 칭찬해 주며,도와주고,이득을 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정신적 보상뿐만 아니라 물질적 보상을 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심리학자인 Aronson과Linder(1965)는 실험을 통해서 계속 좋게 평한 사람보다는 처음에는 비판하다가 나중에 칭찬해 주는 사람을 더 좋아하며,반대로 계속해서 나쁘게 평한 사람보다는 칭찬하다가 나중에 가서 비판하는 사람을 더욱 싫어함을 밝혀냈다. 이를 득실현상(gain-loss phenomena)이라 한다.


따라서,
첫째,칭찬하던 사람은 계속 칭찬하라.
둘째,비난하던 사람은 어떤 순간을 포착하여 강하게 칭찬하라.
그리고,어떠한 경우가 있어도 칭찬하던 사람을 비난하지는 말라.

여성은 쉽게 동조한다.
동조가 행동화되는 유형으로 백화점 세일이 대표적 경우이다. 백화점에서 바겐세일을 하면 여성들은 값싼 것을 다른 사람이 몽땅 사 버릴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 당장에 필요하지 않은 물건까지도 횡재한다는 생각으로 충동 구매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여성은 둘만의 비밀을 좋아한다.
비밀의 공유는 대개 두 사람만의 세계를 형성시켜 서로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차원에서 형성된다. 두 사람이 만나 이런 저런 마음속의 이야기를 주고 받아 서로의 마음을 공유할 때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 지게 된다.



여성 컴플렉스의 이해



착한 여성 컴플렉스
사회가 바라는 여성상은 '착한 여자'가 첫번째 조건으로,그 이면에는 '희생,모순,순종,수동성,인내'로 남성에게 온전히 주기만을 바라는 남성주도의 일방적인 뜻이 숨겨있다. 사회적 통념에 갇혀 무의식 중에 사회가 바라는 여자다운 여자,착한 여자가 되어야 하며 행동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말한다.주위의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무시하는 여성들이 이 컴플렉스에 걸려있다.



신데렐라 컴플렉스
흔히 여성이 갑작스레 유명해지거나 성공하면'신데렐라가 되었다'고한다. 여성은 어려서부터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기 까지 신데렐라 컴플렉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가장 합법적인 안전지대이자 경제적 보루로서 결혼을 선택하여 그 틀에 갇힌 채 남편에게 의존하여 살아간다.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여성은 이 사회가 부자유스럽게 구속하고 있는 억압적 관습을 깨닭지 못하고 그것을 받아 드린다.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극복은 사회,문화 체제와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로 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가 제공하는 평등의 기반이 아니라 여성 스스로의 노력일 것이다.



성(性) 컴플렉스
'여성은 성에 수동적이고 의존적 이여야 한다'는 관념에 의해 사실과 다르게 성에 무관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성적 욕망을 억제하는 심리상태를 말한다. 이제는 여성도 성을 즐길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성개방 풍조가 사회에 퍼져 있으나 여전히 우리 의식 속에는 '내 아내, 내 누이만은, 나만은...'하는 의식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이 현실이다. 성 콤플렉스 역시 여성들 스스로 의식해방을 이루어야 사회적 통념도 바뀔 것이다.



지(知)적 컴플렉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지적 능력에서 열등하다'는 것은 여성스스로 내재화 함으로써 나타나는 지적 열등감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여자는 감정적이고 단순하여 남자보다 사고력이 뒤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성은 집안 일이나 아이를 돌보는데 적합하고 지적인 능력을 요구하는 일이나 사회활동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남성은 사회활동,여성은 집안 일'이라는 고정적인 성 역할을 깨뜨려야만 여성과 남성의 지적 능력은 평등하며 단지 개인의 차가 있을 뿐이라는 논리가 통용될 수 있다.



맏딸 컴플렉스
맏이면서 여자라는 이유로 장남과는 기대치가 달라 지원은 적으면서 가족을 위한 희생을 알게 모르게 강요당해 복합적인 심리를 지니게 되며,자아 실현이나 자기성취에 한계를 느껴 부모나 동생들에게 맏자식으로서,누나로서,언니로서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부담감과 의무감에 사로 잡히는 것을 말한다. 현대를 사는 여성으로 맏딸이 희생의 미덕이라고 생각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자신이 확실한 후에 자기가 스스로 설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의미가 될 수 있다.



슈퍼우먼 컴플렉스
'슈퍼우먼'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관계없이 직장인,주부,어머니,아내,며느리라는 서로 상충되는 여러 역할을 완벽하게 하려는 사람으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지 못하면 심한 불안감,초조감,죄책감 등으로 고통을 받게 된다. 여성은 남성과 같이 사회활동을 함에도 불구하고, 현모양처라는 고정적인 생각 탓에 일을 핑계로 가정 일을 소홀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가정을 핑계로 직장 일에 무능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24시간 내내 종종걸음을 친다. 여성은 남편에게 가사일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면서 미안해 할 일이 아니라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의식을 가져야만 한다.



신세대 여성의 이해



신세대란?
70년대에 태어난 세대 즉 20대의 젊은이들을 신세대로 구분 짓는가 하면 60년대에 출생한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신세대의 시초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세대를 나이만으로 구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얼마나 새롭고 앞선 사고를 하느냐가 바로 신세대를 규정하는 기준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세대의 성향
서구화,개성화,고급화,패션화 경향을 들 수 있다.'생계를 꾸려나가는 수준에서 생활을 즐기는 수준'으로 경제력이 향상됨에 따라 소비 패턴도 양보다는 질을,더 나아가 개성과 감각을 우선으로 여긴다.
직장생활과 일 중심의 생활 패턴에서 개인과 가정 중심의 생활로 변화되었다.
기성세대가 타인을 의식하고 체면을 중시한 반면 신세대는 자신감 있고 자기 표현력이 강하다.
기성세대가 종속적이며 당위적인 업무 태도를 보이는데 반해 신세대는 계약적이며 일에 대한 보상심리가 강하다.



신세대의 일반적인 특성
신세대들은 권위주의를 거부한다.
신세대들은 다소 모험이 뒤따르더라도 자유로운 직업을 원한다.
신세대도「분위기」만큼은 약하다.
신세대는 구체적인 것을 좋아한다.
신세대는 직장보다는 직종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신세대 여성의 생활패턴
자기개발에 과감히 투자,새로운 것을 배운다.
같이 일하고 같이 논다.
내차(마이카)로 살림,사회활동을 한다.
외식도 레저로 한다.
틈만 나면 여행을 즐긴다.
개성미 중시,초 미니도 OK!



신세대 관리기법
가끔 둘만의 시간을 가진다.
분위기나 느낌으로 접근한다.
개인 시간을 존중해 준다.
위임한다.
합리적으로 사고 한다.
성차별을 하지 않는다.
인격체로 인정하고 독려한다.
실사구시를 솔선 수범한다.
미리 단념하지 않는다
대화의 끈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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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랑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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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정의[편집]

생명이란 자체 신호를 가지고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는 물체를, 그러한 기능이 종료되었거나 (죽음) 또는 그러한 기능이 없어 비활성체로 분류되었거나를 막론하고 그렇지 않은 것과를 구별짓는 특성이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생명체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니지만 엄밀하지는 않다.


물질대사에 바탕을 둔 정의[편집]

생장한다.

물질대사를 한다.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 움직인다.

자신과 닮은 개체를 생산해 내는 생식기능이 있다.

외부 자극에 반응한다.

위의 기준을 엄밀하게 적용한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긴다.


불이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노새는 생식 능력이 없으므로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그러나 노새의 세포 하나하나는 분열할 수 있다)

바이러스는 성장하지 않고 숙주세포 바깥에서는 생식을 할 수 없으므로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

지구상의 생명체를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다음과 같은 현상을 보인다고 한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탄수화물, 지질, 핵산, 단백질과 같은 성분을 지니고 있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살아가기 위해 에너지와 물질을 모두 필요로 한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하나나 그 이상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항상성을 유지한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종은 진화한다.

지구상의 생명체는 모두 탄소로 이루어진 유기체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점이 모든 우주의 모든 생명체에도 해당한다고 보지만, 다른 이들은 이 현상을 '탄소 쇼비니즘'이라고 부른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호흡을 해야한다


생화학적(분자생물학적) 정의[편집]

생물(生物) : 생명이 있는 것

생물을 구성하는 생화학적 분자들

단백질

지방(지질, 지방산)

탄수화물

핵산(DNA, RNA)

효소반응 : 단백질로 만들어진 생체 촉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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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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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DNA입니다.

Deoxyribonucleic acid(디옥시리보핵산)

생명의 청사진

후손에게 전해지는 유전물질(예외 : retro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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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NA[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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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mRNA(messenger RNA)를 가리킴

Ribonucleic acid(리보핵산)

단백질 합성의 청사진

3종류의 RNA:

전령 RNA(Messenger RNA, mRNA) : 단백질의 설계도

리보솜 RNA(Ribosomal RNA, rRNA) : 단백질 합성장소

운반 RNA(Transter RNA, tRNA) : 아미노산의 운반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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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생물학의 기본 패러다임 : 분자생물학[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분자생물학입니다.

단백질의 효소와 생합성을 지배하는 디옥시리보핵산 또는 디엔에이(DNA)의 구조와 특성을 바탕으로, 중요한 생명현상을 설명하려는 생물학의 한 분야이다. 분자생물학의 발달은 1940년대에 DNA가 유전자의 본체임이 밝혀지고, 동시에 DNA의 유전정보가 RNA를 통하여 세포질 속에서 단백질 합성을 지배한다는 사실이 차츰 알려지게 되었다. 더욱이 1953년 J.D.웟슨과 F.H.C.크릭에 의하여 DNA의 이중나선구조의 모형이 제출됨에 이르러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였다. 그 후, 분자생물학의 주류는 DNA의 복제 및 단백질의 생합성을 중심으로 하여 유전의 본질 및 유전의 메커니즘을 설명하고, 나아가서 생물체의 조절작용이나 진화의 현상을 설명하는 것으로 되었다. 따라서, 분자생물학의 중심이 되는 것은 분자유전학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근육의 기본이 되는 수축단백질인 액토미오신이라는 단백질의 분자구조를 바탕으로 근육의 수축운동을 설명한다든지, 뇌에 있어서의 기억의 기작을 단백질이나 RNA의 미세한 구조의 변화로 설명하려는 일 등도 분자생물학에 포함시키고 있다.


유전학적 정의[편집]

다윈의 <종의 기원>[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종의 기원입니다.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1809년~1882년)의 생물의 진화론에 관한 저서로서, 1859년 11월 런던의 존 머리사(John Murray社)에서 간행하였다. 다윈은 1858년 7월 1일 린네 학회에서 A.R.월리스와 함께 진화론의 논문을 발표하고 나서, 요약 형식으로 이 책을 간행하였다. 전문 14장으로 구성되고, 변이(變異)의 법칙·생존경쟁·본능·잡종(雜種)·화석(化石)·지리적 분포·분류학 및 발생학 등의 여러 면에서 자연선택을 전개하고 있다. 1872년에 간행된 제6판이 최종판인데, 이때 과학적으로 제기된 여러 이론(異論)에 답한 새로운 한 장(章)이 제7장으로 추가되었다.


W.페리의 자연신학(自然神學)의 토대였던 적응의 현상에 자연적 설명을 부여하려는 것이 이 책을 간행하게 된 목표 중의 하나였다. 간행 직후부터 종교계의 심한 공격을 받았으나, 약 10년만에 생물학계에서 확고한 지위를 획득하였다.


멘델의 유전법칙[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멘델의 유전법칙입니다.

멘델(G.J. Mendel)이 완두콩을 이용한 교배 실험을 통해서 밝혀낸 유전법칙. 1865년에 처음 발표되어 유전학을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 멘델 이전에는 유전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정자와 난자 속에 있는 액체가 섞여서 부모의 특징이 이어진다는 혼합 이론을 사용하였다. 이 이론에 대항하여 멘델은 부모의 특성, 즉 형질을 결정하는 것은 단위로 환원할 수 있는 물질이라는 것을 밝혀 냈다. 멘델 스스로는 여기에 따로 이름을 붙이지 않았지만 이것이 바로 유전자이다. 즉 멘델은 그의 법칙을 통해 유전자 개념을 처음 과학적으로 확립한 셈이다. 그러나 당초 1865년에 멘델이 처음 이 법칙을 발표했을 때에는 크게 주목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 성과가 완전히 묻힌 것은 아니고, 다른 학자들의 논문에서도 멘델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었으며 1881년에 나온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도 멘델의 연구가 소개되어 있었다. 그러다 1900년에 코렌스(C. Correns), 체르마크(E.V. Tschermak), 드 브리스(H. de Vries)가 유사한 연구를 하다가 동일한 시기에 멘델의 연구를 다시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중에서 코렌스가 멘델의 연구 성과에 "멘델의 법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멘델의 연구[편집]

멘델은 자신의 연구를 위해서 완두콩을 그 재료로 사용했다. 우선 완두콩을 잘 키워서 키가 큰 완두콩과 키가 작은 완두콩을 서로 분리해 낸다. 이렇게 키가 큰 것과 작은 것이 각각 완두콩의 형질이 된다. 키가 큰 것은 큰 것대로 따로 키우고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따로 키워서, 몇 세대 후에는 무조건 키가 큰 종자와 무조건 키가 작은 종자를 얻는다. 이 완두콩들을 서로 교배를 시켰더니 키가 큰 완두콩이 나오는 종자만을 얻을 수 있었다. 기존 발상으로는 키가 큰 것과 작은 것의 중간 키 정도가 되는 완두콩이 나와야 했는데 그렇지 않은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 가지 형질만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우열의 법칙이라고 하며, 이때 나타나게 되는 키가 큰 형질을 우성, 반대로 나타나지 않는 키가 작은 형질을 열성이라고 한다. 다음에는 이렇게 얻은 완두콩을 자가수분을 거쳐 다시 키워 보았다. 그러자 키가 큰 완두콩과 작은 완두콩의 비율이 3대 1로 나타났다. 이를 분리의 법칙이라고 한다. 또한 멘델은 완두콩의 키 이외에도 다른 형질로도 실험을 했다. 둥근 완두콩과 주름진 완두콩, 그리고 녹색 완두콩과 노란 완두콩에서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러한 서로 다른 형질은 상관관계가 없이 서로 독립적으로 우열의 법칙과 분리의 법칙을 나타냈다. 이것을 독립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 세 가지가 바로 멘델의 법칙이다.


멘델의 재발견[편집]

멘델의 법칙은 1884년 멘델이 사망한 후 16년 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1900년에 와서 세 명의 연구자에 의해 다시 발견되었다. 네덜란드의 드 브리스는 1890년대에 달맞이꽃을 가지고 독자적인 실험을 해서 멘델의 법칙을 발견했으며 1895년에 멘델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독일의 코렌스는 완두콩으로 실험을 해서 1899년에 멘델의 법칙을 다시 발견했으며 이때 멘델의 논문을 다시 읽어보았다고 한다. 그 후 멘델과 같은 실험을 했다는 사실에 논문 발표를 꺼리고 있다가 1900년에 드 브리스가 발표하기 직전의 논문에 멘델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고 멘델을 소개하기 위해 "멘델의 법칙"이라는 논문을 썼다. 사실 드 브리스의 논문에는 멘델에 대한 언급이 있었지만 번역하는 도중에 빠졌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체르마크는 오스트리아에서 역시 완두콩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었으며 드 브리스의 논문을 보고 급히 자신의 논문을 투고하여, 세 사람의 논문은 같이 게재되었다.


멘델 법칙의 한계와 발전[편집]

멘델의 법칙은 매우 훌륭한 이론이었으나 이후 연구가 계속되어 유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더욱 잘 알게 된 이후에는 한정적인 상황에서만 성립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우선 독립의 법칙은, 해당 형질을 나타내는 유전자들이 서로 다른 염색체에 있을 때에만 성립한다. 이것은 멘델이 매우 운이 좋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완두콩의 상동염색체는 모두 7쌍( {\displaystyle 2n=14} {\displaystyle 2n=14})이며, 멘델이 확인한 7개의 형질은 모두 각각 다른 상동염색체에 있는 형질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열의 법칙이나 분리의 법칙도 완전한 법칙은 아니다. 불완전우성으로 인해 나타나는 중간유전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멘델의 법칙은 그 전까지 수학적인 방법론이 거의 존재하지 않던 생물학에서 통계적인 방법론을 사용하여 정확한 가설을 제시한 이론이자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한 유전학을 처음 정립한 법칙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복제[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복제 (생물학)입니다.

유전물질이 자기복제를 하는 것을 일컫는 말로 유전물질의 생합성은 1개의 어미 분자가 주형이 되어 그것과 똑같은 구조와 기능을 가진 새끼 분자 2개가 만들어 내는 일이다. 이것은 반보존적 복제에 의해 이루어진다. 유전물질로서 DNA와 RNA는 고분자화합물이며 생세포 속에서 이 유전물질의 합성은 일련의 생화학 반응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유전물질의 생합성만을 복제라고 하는 것은 1개의 어미 분자가 주형이 되어 그것과 똑같은 구조와 기능을 가진 새끼분자 2개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전물질의 자기증식은 모두 반보존적 복제에 의해 이루어진다.


변이[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변이입니다.

같은 종의 생물 개체에서 나타나는 서로 다른 특성. 모든 생물 종(種:species)은 서로 비슷한 모양을 가지며 자신과 닮은 모습의 자손을 남길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 내의 생물은 완전히 같은 모양으로 생기진 않았으며, 또한 이들이 남기는 자손 역시 부모의 형태와 어느 정도 다르다. 이런 식으로 개체간에 서로 다른 특성을 변이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의 변이는 각 개체가 가지는 어떠한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형질(形質: character, trait)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변이에는 유전적으로 타고 나는 유전변이와, 개체가 성장해 가면서 환경에 영향을 받아 생기는 환경변이 두 가지가 있다. 유전변이는 일반적으로 부모가 가지고 있는 형질을 이어받는 것이기 때문에 유전학을 통해서 예측할 수 있지만 환경변이는 발생과 성장 과정을 거치며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개체가 가지는 키, 몸무게, 형태를 비롯하여 동물의 행동 등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모든 세세한 차이는 모두 변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유전적으로 타고난 것과 자라면서 형성되는 것이 있으며 때로는 이 두 가지의 요인이 동시에 작용하기도 한다.


돌연변이[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돌연변이입니다.

유전변이는 일반적으로 부모에게서 생식세포를 통해 이어내려오는 유전자 내용을 통해서 자손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유전변이 중에서는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DNA 서열(序列: sequence) 변화와 같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발생하는 완전히 새로운 변이도 있는데 이는 돌연변이(突然變異: mutation)라고 한다. 돌연변이는 그렇게 잘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없던 완전히 새로운 변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원인이라고 추측된다. 때문에 이러한 돌연변이는 진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여겨지고 있으며, 생물학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변이와 생물학[편집]

변이는 개체간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개체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개체변이라고 할 때는 유전변이와 환경변이 중에서 후천적인 환경변이만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환경변이는 개체가 태어난 후에 유전자와는 상관없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자손으로 유전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과거의 진화론에서는 이러한 환경변이, 즉 후천적으로 획득한 형질도 유전된다는 사고방식이 있었으나 현재의 진화론, 특히 신다윈주의(Neo Darwinism)에서는 이러한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라마르크(J.B. Lamarck)가 용불용설(use and disuse theory)을 통해 획득형질이 유전된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진화론을 만든 다윈(C. Darwin)도 판게네시스(pangenesis)라는 유전 이론을 통해 획득형질이 유전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은 멘델의 연구를 기반으로 한 유전학이 발달되면서 부정되었으며, 현대 생물학에서는 환경변이가 유전된다고 보지 않는다. 때문에 현대 생물학 연구에서는 환경변이보다는 유전변이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사항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현대 생물학은 전체 변이 중에서 유전변이가 나타나는 비율을 유전율(heritability)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적응(자연선택)[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자연선택입니다.

생물의 형태나 기능이 환경조건에 잘 적합하여 개체와 종족 유지에 도움이 되고 있는 것 또는 그와 같은 성질이 진화과정에 의하여 성립되어 온 것을 말한다. 보통은 개개의 형질에 대해 그것이 생존 또는 번식하는 데 있어 유용한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꿀샘의 존재는 곤충을 유인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적응형질이다. 또는 그와 같은 성질이 진화과정에 의하여 성립되어 온 것을 말하기도 한다.


어떤 생물도 종족을 유지해 가는 데 있어서 전혀 부적합한 형질을 가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나, 보통 적응이라고 할 경우에는 개개의 형질에 대해 그것이 생존 또는 번식하는 데 있어 유용한 것을 말한다. 식물의 꽃잎이 3개냐 5개냐 하는 것은 반드시 적응에 관계되는 형질은 아니지만, 꿀샘의 존재는 곤충을 유인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적응형질이며, 꽃잎에 곤충이 앉았을 때 화분이 곤충의 몸에 잘 묻도록 되어 있는 꿀풀과(科)나 난초꽃의 구조에서는 적응이 한층 두드러진다.


그러나 어떤 형질이 적응된 것인지 아닌지, 또 적응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의 판정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집단유전학에서는 어떤 유전자형과 그에 대립하는 유전자형이 다음 대에 남기는 번식가능한 자식의 수의 상대값을 기준으로 하여 적응값의 개념을 세우고, 이것을 적응현상의 수량적 표현으로 삼고 있다. 즉, 몇 개의 대립하는 유전자형이 있을 때, 다음 대에 남기는 번식가능한 자식의 수가 최대인 것의 적응값을 1로 하고, 다른 것은 이것과의 상대값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한 개체가 성장하는 동안에 환경의 영향을 받아 그 환경에 적합한 형질을 나타낼 때, 그것을 적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광의 조사를 많이 받는 생활을 계속하여 피부에 색소가 증대되어 몸을 방호(防護)하는 것은 그 하나의 예이다. 급히 달릴 때 숨이 가빠지거나 또는 밝은 곳이나 어두운 곳에서 눈동자의 크기가 조절되는 것 등의 일시적 변화는 순응(順應)이라 하여 적응과는 구별된다. 또한, 한 개체만의 변화도 조절 또는 순응에 포함시킬 수가 있다. 진화에서 생활조건이 현저하게 변화하여 어떤 형질이 부적합한 채로 잔존되거나, 발달하거나 하면 그 생물은 멸망에 가까워진다.


열역학적 정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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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분류[편집]

종, 속, 과, 목, 강, 문, 계

원핵생물계, 원생생물계, 식물계, 군류계, 동물계

세 가지 류 : 진세균류, 시원세균류, 진핵생물류

진핵생물류의 4가지 계 원생생물계, 식물계, 균류계, 동물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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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진화[편집]

종의 진화는 종의 진화이다..


용불용설[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용불용설입니다.

생물에는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있어, 자주 사용하는 기관은 발달하고 사용하지 않는 기관은 퇴화하여 없어지게 된다는 학설로 J.라마르크가 제창한 진화설이다.


어떤 동물의 어떤 기관이라도 다른 기관보다 자주 쓰거나 계속해서 쓰게 되면 그 기관은 점점 강해지고 또한 크기도 더해간다. 따라서 그 기관이 사용된 시간에 따라 특별한 기능을 갖게 된다. 이에 반해서 어떤 기관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차차 그 기관은 약해지고 기능도 쇠퇴한다. 뿐만 아니라 그 크기도 작아져 마침내는 거의 없어지고 만다.

 

— J.라마르크, 《동물철학》(1809년)의 제1법칙

이와 같은 현상이 새로운 종(種)의 진화 원인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즉, 많은 동물에서 볼 수 있는 특수한 형태나 작용을 갖는 기관은 이렇게 하여 생긴 것이며, 또한 퇴화기관으로 알려져 있는 많은 흔적기관(痕跡器官)도 이렇게 하여 생긴 것이라고 그는 설명하였다.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는 1809년에 출간한 《동물 철학 (Philosophie Zoologique)》에서 생물종이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기본 원리를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동물 철학》에는 진화가 일어나는 기본 법칙이 두 가지로 설명되어 있다.


첫 번째 법칙은 종 내에서 특정 형질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기작에 대한 설명이며, 두 번째 법칙은 그러한 변화가 번식 과정에서 다음 세대에게 전해짐으로써 종의 점진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용불용설은 한 개체에서 형질의 변화가 일어나는 원인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첫 번째 법칙에 해당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의 이론을 형질전환 이론(theory of transformation)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용과 불용(Use and Disuse)[편집]

라마르크의 이론은 동물의 형질이 변화하는 기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동물이 어떤 기관을 다른 기관보다 더 자주 쓰거나 지속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그 기관은 사용 시간에 비례하여 점차 강해지고 발달되며 크기도 커지게 된다. 반면, 어떤 기관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그 기관은 점차 약화되고 기능도 쇠퇴하여 결국 사라지게 된다.

용불용설의 개념을 설명하는 전통적인 예로 기린의 목이 늘어나는 과정을 들 수 있다. 기린은 일생 동안 높은 가지에 있는 잎을 먹기 위해서 목을 늘이는 것을 되풀이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오랜 기간 지속한 결과 기린의 목은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라마르크는 기린이 목을 늘이는 현상이 일어나는 원인을 "완벽함을 향한 자연적인 경향성 (natural tendency toward perfection)"으로 설명하려 하였다. 라마르크가 이용한 또 다른 예는 물새의 발가락이다. 물새는 물을 가로지르며 수영 하는 행동에서 발가락을 늘이는 노력을 들이게 되었고, 그 결과 수영하기에 더 적합한 길고 물갈퀴가 달린 발가락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두 가지 예는 어떤 기관을 사용함에 따라 그 형질이 변화하고 발달해 나가는 과정을 설명해준다. 같은 맥락으로, 라마르크는 어떤 기관을 사용하지 않으면 형질이 약화되어 축소될 것이라고 믿었다. 예로 들어, 펭귄의 날개는 날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지 않게 되어 점차 퇴화되어 작아졌을 것이다. 용불용설은 많은 동물에서 볼 수 있는 특수한 형태나 작용을 갖는 기관은 이렇게 하여 생긴 것이며, 또한 퇴화기관으로 알려져 있는 많은 흔적기관(痕跡器官)도 이렇게 하여 생긴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획득형질의 유전(Lamarckian Inheritance)[편집]

개체 수준의 변화는 번식을 통해 다음 세대로 전해져야 유지될 수가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라마르크는 획득형질이 유전되는 기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개체가 주변 환경의 영향으로 어떤 기관을 더 많이 사용하거나 오랜 기간 사용하지 않은 경우, 이러한 결과로 얻은 기관의 변화는 번식에 의해 새로 태어나는 개체로 전해진다. 획득된 형질은 그 변화가 부모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났거나 적어도 암컷이 형질을 획득한 경우에 유전될 수 있다.

그는 한 개체가 일생 동안 획득한 형질을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다고 믿었다. 기린의 경우, 목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긴 목을 얻은 개체의 자손은 부모의 형질을 물려받아 긴 목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환경의 변화가 생물체의 행동을 변화시키고, 행동의 변화는 특정 기관의 발달이나 퇴화를 유도한다. 이는 자손에게 전해져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뚜렷한 형태의 변화가 나타나게 되고, 그 결과 종의 점진적인 변이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라마르크 이론의 한계와 의의[편집]

라마르크의 첫 번째 법칙은 종의 다양성이 생기는 기작을 설명하기에 적절했지만, 두 번째 법칙은 경험적으로 설명되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멘델(Gregor Mendel)이 유전의 분자적인 특성을 밝힘으로써 획득된 형질은 유전되지 않음이 증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마르크의 이론의 의의는 종의 다양성이 생겨나는 기본 원리를 처음으로 제시하였다는 데에 있다. 이로부터, 진화적인 변화는 점진적으로,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현대 진화이론이 발전하였다. 그는 고대의 바다 조개를 연구하면서 오래된 것일수록 생김새가 단순하다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이를 통해 종은 단순한 것에서 출발하여 끊임없이 복잡한 것을 지향한다고 결론지었다.


적자생존[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적자생존입니다.

적자생존은 생존경쟁의 원리에 대한 개념을 간단히 함축한 말이다. 이 말은 다윈(C. Darwin)의 진화론에 대한 원리로 잘 알려져 있지만, 다윈이 처음 사용한 말이 아니며 영국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스펜서(H. Spencer)가 1864년 "생물학의 원리(Principles of Biology)"라는 저서에서 처음 사용했다.


용어의 역사[편집]

1851년에 자유시장경제에 대해 서술한 "사회 역학(Social Statics)"이나 1862년의 "철학의 새로운 시스템을 위한 첫 번째 원리(First Principles of a New system of Philosophy)"까지도 스펜서는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고, 이 때는 다윈의 저서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을 보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려 했던 적자생존은, 다윈이 '자연선택'이라고 했던 것이며 생존 경쟁에서 가장 좋은 종족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스펜서(H. Spencer), "생물학의 원리"

적자생존은 스펜서의 1884년 저서인 "개인 대 국가(The Man Versus The State)"에서 더욱 강하게 사용된다. 그는 여기서 더 좋은 물건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는 살아남아 시장을 점령하고, 이러한 소비자의 경향에 잘 따라오지 못하는 회사는 경쟁에 의해 도태된다는 이론을 주장했다. "종의 기원" 4판까지 다윈은 자연선택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했다. 하지만 진화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과학자인 월리스(A.R. Wallace)는 선택(selection)이라는 용어가 인위적인 느낌을 가진다고 생각했고, 다윈도 결국 거기에 동의한다. 그래서 스펜서의 "생물학의 원리"에서 경제학과 생물학을 동일선상에 놓고 적자생존이라는 용어를 쓴 것을 착안, 1869년에 나온 "종의 기원" 5판에서는 자연선택과 동일한 의미로 적자생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다윈은 여기서 적자생존이라는 문구를 만든 공적을 모두 스펜서에게 돌리고 있으며 자연선택에서 인위적인 느낌을 제거했다는 면에서 이 문구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적자생존이라는 문구는 진화론의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문구처럼 일반인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으며 이는 결국 사회적 다윈주의(social Darwinism)와 우생학(優生學: eugenics)까지 낳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오히려 진화생물학에서는 적자생존이라는 문구를 쓰지 않게 되었으며 현재 자연선택과는 다른 의미로 보고 있다.


용어의 의미[편집]

적자생존은 본래 영어: survival of the fittest의 번역 용어이다. 때문에 이 문장을 그대로 번역하면 "가장 적합한 자의 생존"이 된다. 이 의미는 적자생존이라는 번역 문장이 되면서 "가장 강한 자의 생존"이라는 식으로 주로 생각되지만, 강하다 약하다 하는 것은 이 "적합"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적합은 환경에 대한 적응도(fitness)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환경이 변화하는 것에 따라 이 적응도도 변화하기 때문에 이를 강함이나 약함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 생물학에서 적응도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는 다음 세대로 가는 일종의 번식 성공률(reproductive success)으로 본다. 또한 적자생존은 순환적이라는 부분에서 자주 공격을 받아 왔는데 즉 "살아 남기 때문에 적합하고", "적합하니까 살아 남는다"는 식의 순환논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러한 순환논리라는 약점 때문에 현대 진화생물학에서는 적자생존이라는 문구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생명의 기원[편집]

자연발생설

배종발달설

생물학적 진화 이전의 단계

지구물리학적 단계

처음에 대기는 수소, 질소, 일산화탄소, 이산화탄소 등의 기체로 이루어져 있었을 것이다.

산소와 수증기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지각이 식어서 물이 응결되면서 비가 오고 물의 순환이 시작함

화학적 단계

연구의 다변화

20개 이상의 아미노산, 당, 핵산의 겸기, ATP 생성

의미 : 무생물에 들어 있는 주요 탄소 고분자의 생성 시나리오

가능한 환경

심해의 용오름

물의 증발과 농축이 반복되면서 생기는 조수력

"RNA 세계"로 이어지는 일련의 화학적 사건들

생물학적 단계

초기의 생명 형성에 참여했을 만한 생체분자들

단백질 : 아미노산의 다양성, 촉매(효소)

DNA : 안정성, 정보의 저장

RNA : 다양성, 정보의 저장, 촉매 (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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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발생설[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자연발생설입니다.

생물은 자연적으로 우연히 무기물로부터 발생한 것이라는 설로 이 설에 의하면 생물은 어버이가 없이도 생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20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 이후 논쟁되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미생물학자인 루이 파스퇴르의 실험에 의해 이 가설이 거짓임이 확증되었으며, 그 결과 생물은 결코 자연발생하지 않는다는 생물속생설이 확립되었다.


이 설에 의하면 생물은 어버이가 없이도 생길 수 있다. 자연발생에 관한 최초의 관념은 민달팽이 ·개구리 ·쥐 등이 돌연히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 지금부터 20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도 무척추동물뿐만 아니라 고등척추동물도 자연발생한다고 주장하였다. 17세기에는 독에서 쥐의 새끼를 낳게 할 수 있다는 처방이 발표되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프란체스코 레디(Francesco Redi)가 썩은 고기에서 구더기가 자연발생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라는 것을 실험으로 제시하였다. 18세기 초 끓인 육즙 속에서 미생물이 발생한 것을 보고 적어도 미생물만은 자연발생된다는 니담(John T. Needham)에 대하여, 그것을 반대하는 주장을 스팔란차니(Lazzaro Spallanzani)가 실험으로 제시하였다.


18세기 중엽에는 자연발생에 대한 논쟁이 매우 활발하였다. 이 논쟁은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미생물학자인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의 실험에서 완전히 끝을 맺었다. 그는 끓인 고기즙에 공기는 통하면서 미생물이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S자형 플라스크를 만들어 두었더니 고기즙에 미생물이 번식하지 못한다는 결과를 관찰하였다, 이에 따라 세균의 자연발생이라는 것은 공기 속의 포자(胞子)가 침입하여 번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하여 자연발생설을 부정하였다. 파스퇴르는 이 실험으로 생물은 결코 자연발생하지 않는다는 생물속생설을 확립시켰다.


배종발달설[편집]

19세기 초엽에 프랑스의 학자 몽리보[누가?]는 생명의 씨앗을 지닌 천체 조각들이 지구에 도달함으로써 지구가 생명을 잉태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개념은 19세기 중엽에 리히터[누가?]에 의해서 더 발전되었다. 그는 천체가 빠른 속도로 운동할 때 작은 조각들이 떨어져 나왔을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를 두고 그의 학설을 전개하였다. 그는 생명력을 가진 미생물의 포자들이 이러한 천체 조각들에 묻게 되었고, 이 조각들이 별들 사이의 우주 공간을 떠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지구나 다른 행성에 내려앉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만일 행성의 습도와 온도가 적합하면 포자들은 그 곳에서 성장하여 지금 그 행성에서 살고 있는 모든 생물들의 조상이 되었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스웨덴의 유명한 물리화학자 아레니우스는 1906년에 리히터의 학설과 비슷한 배종발달설이라는 학설을 제창하였다. 그는 생명의 씨앗이 빛 또는 우주선의 복사압력에 의해서 다른 행성에서 지구까지 밀려 왔다고 하였다. 아레니우스는 직경이 약 0.2㎛ 되는 세균의 포자가 태양계로부터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별에서 지구까지 오는 데 약 9,000년이 걸릴 것이라는 계산을 하였다.


생명과 물질의 경계[편집]

쉬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의 본질은

정보

음의 엔트로피

자유에너지

자체조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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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정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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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正義, justice[편집]


1.1. 정의[편집]


사전적으로는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를 뜻한다.


1.2. 어원 [편집]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정의를 담당하는 여신 유스티티아(Justitia)에서 이름을 따왔다. 때문에 유스티티아의 여신상이 법정 앞에 세워져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동양에서는 'justice'의 번역어로, 동양 철학의 義와는 살짝 다른 개념이다. 영어에서 Justice는 사법적, 판결적 의미가 강하지만, 동양에서 말하는 의리, 도의 할때 義는 영어로 번역하면 justice에 righteousness, 즉 주관적, 도덕적 당위성이 첨가 된 개념이다. 


1.3. 내용[편집]


평화로운 세상이 오면 그것을 정의가 바로 서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상적인 국가가 아닌 한 어느 나라든지 이것을 완벽하게 실현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현실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류 모두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담으로, 정의는 선(善)이 아니다. 또 한, 악(惡)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선과 악은 한 끗차이. 정의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기에 선일 수도 악일 수도 있다.


정의(正義)의 경우 법철학을 비롯해 서구 역사에서 가장 폭넓게 받아지는 가장 간결한 정의(defini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독일의 법철학자 구스타브 라드부르흐는 이러한 법이념으로서의 정의가 실제 법이 무엇을 해야할지 지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합목적성, 법적 안정성이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정치 철학자 마이클 왈저에 의하면 같은 맥락에서 이러한 정의의 원칙은 궁극적으로 상대적인 배분의 원칙을 의미한다고 썼다. 


계몽주의 시대까지만 해도 절대적인 정의는 존재한다는 생각이 주도적이었다가 이후 정의란 상대적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실제로 정의라는 것을 연구하는 것 자체가 쓸모없는 일이라는 견해가 팽배했다.


그러다가 존 롤스라는 걸출한 학자가 20년의 연구 끝에 1971년 '정의론'이라는 책을 출판했고, 이를 현대 정의론의 출발로 본다. 이후 정치철학계이나 철학계에서 다시금 정의를 연구하게 되었고 논쟁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정의란 무엇인가》 로 최근에야 한국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정치철학자인 마이클 샌델이 1982년 롤스를 비판하는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 라는 책을 발표하면서 정의론을 비판했다.


현대에는 '편향된 주관이나 윤리에서 벗어나 최대한 공정한 입장에서 개인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것' 정도가 가장 흔한 정의의 개념이자 대중적으로 인정되는 정의(正義)의 정의(2)라고 할 수 있다. 사람에 따라서 생각이 달라진다는 건 이 개념을 사회에 적용시킬때 어떤 방향으로 해석하는가 정도지, 위의 개념 자체를 흔들지는 않는다. 문제는 위의 정의에 쓰인 개념들도 하나하나가 상당히 모호한 것들이라 애매하기는 여전하다는 것.


사실 정의(正義)는 어떤 범주에 가까워서, 이렇다 할 명확한 것은 없고 사람마다 다르다. 즉 "만인이 인정하는" 정의(2) 를 찾기 힘들다. 하지만 대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2)인 '자기 자신에게 합당한 몫이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이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2)로 가장 유명하고 또 널리 인정받는다. 그 외 로마 제국의 법학자 울피아누스는‘각자에게 그의 몫을 돌려주고자 하는 항구적인 의지'라고 정의하고, 현대에 들어서 존 롤스는 ‘정당화될 수 없는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어찌되었건 정의(正義)를 정의(2)할 때 분배, 평등, 불평등, 능력, 노력, 필요, 합당한 보상, 공정성 등이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법심리학 등의 학계에서 말하는 정의의 구성 요소는 다음의 세 가지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T.R.Tyler[1]의 문헌들을 참고할 것.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 : 제한된 자원을 배분(allocation)함에 있어서 그 결과가 각 개인들이 기대한 기준과 같은지에 해당하는 정의.[2] 물론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 그것이 부당하다고 인식되나, 흥미롭게도 자신의 기준보다 더 많은 자원을 받게 되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것을 부당하다고 인식한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차후 자신이 덜 받게 되더라도, 그러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집단이나 상황을 떠나는 쪽을 선택한다![3] 사람들이 이처럼 분배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진화적으로 상당히 적응적인 것이다.

절차적 정의(procedural justice) : 자원의 배분을 비롯한 각종 의사결정 상황과 그 과정, 참여자 모집, 의견의 표출 등의 측면들에서 각 개인들의 존엄한 대우를 보장하는 것에 해당하는 정의. 절차적 정의 없이 분배적 정의는 성립할 수 없으며, 절차적 정의가 공정하다고 지각되면 분배적 정의 역시 공정하다고 지각된다. 흥미롭게도,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배분받는지와는 무관하게, 절차적으로 자신이 배제되고 멸시당하며 고립당하는 느낌을 받을 경우 아무리 많은 자원을 배분받더라도 만족하지 않는다![4] 현대의 학계에서는 지각된 정의(perceived justice)의 핵심 요소라고 간주되고 있다.

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 : 절차적 정의를 통해 성립된 체제나 의사결정 결과를 훼손한 범칙자에 대해 적합한 처벌과 사회적 질서의 회복을 요구하는 것에 해당하는 정의. 고의적이지 않는다면 처벌보다는 사회적 회복[5]이 주가 되지만, 악질적 범죄라고 여겨질 경우[6] 그만큼 강력한 처벌을 원하는 목소리가 강해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범죄 억지력 혹은 위하력(deterrence)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질서의 회복을 기대함으로써 응보를 요구한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절차적 정의가 보장되지 않은 체제나 의사결정에 대해서는 그것을 위반하거나 훼손하더라도 크게 비난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1.4. 어록[편집]


정의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 소크라테스

정의는 '강자의 이익'입니다.

-트라시마코스

정의란 각자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받는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는 그 안에 분노를 지닌다. 정의에서 나오는 분노는 진보의 한 요소가 된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피레네 산맥 이쪽에서의 정의는 저쪽에서의 불의다.

-블레즈 파스칼

정의는 죽지 않는다.

성경 지혜서 1장 15절

정의에 복종하는 것은 옳고 더 강한 것에 복종하는 것은 필연이다.

힘없는 정의는 무력하고 정의없는 힘은 폭력이다. 힘없는 정의는 반대에 부딪힌다. 왜냐하면 사악한 자들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정의없는 힘은 규탄받는다. 그러므로 정의와 힘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정의가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의로워야 한다.

정의는 논란의 대상이 되지만 힘은 매우 용이하게 식별되고 논란의 여지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의에 힘을 부여할 수가 없었다. 힘이 정의에 반대하고 그것을 불의라고 말하며 또 정의는 바로 자기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은 정의를 강하게 할 수 없었으므로 강한 것을 정의로 만들었다. 

- 블레즈 파스칼, <팡세>, 192(298)

할 수 없구나, 잘 가거라. 나는 오늘까지 양심이라는 것은 비겁한 놈들의 겉치장이요, 정의는 권력의 버섯인 줄 알았는데, 그것들이 진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네가 무섭구나, 네가…….

- 김성한의 소설 《바비도》

정의란 각자에게 그의 권리를 분배하는 부단하고도 항구적인 의지이다.

- 울피아누스(Ulpianus)[7]

1.5. 서브컬쳐에서의 정의[편집]


거의 모든 예술 작품에서 주인공을 정의롭다고 느끼게 만드는 장치를 사용하는데, 이는 독자들이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을 하게 만드는 장치일 뿐 실제로는 주인공의 행동이 공공선을 실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가 원피스. 루피 해적단을 약탈도 안하고 다른 해적단에 비해 천사처럼 그리고있기는 하지만 현실을 기준으로보면 해군들을 조지고 다니는 악당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작품 내에서도 주인공 측이 절대선이 아님을 보여주는 만큼 소년만화 치고는 독특한 경우다. 그 밖에도 주인공이 살인이나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지만 선하게 그려지는 모든 작품들도 이에 해당된다. 때문에 창작물에서의 정의는 실제보다 더욱 상대적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에는 대놓고 정의가 아닌 인물을 주인공으로 두어 부조리극의 느낌을 내는 경우도 많고, 피카레스크라는 장르도 생겼다. 브레이킹 배드와 데스 노트가 대표적.


피카레스크물이 아닐 경우, 주인공 이외에 자신을 정의라 칭하는 자는 대체로 독선, 민폐쟁이, 위선자라는 클리셰가 있다.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가지는 신념의 기반. 신념이라고 해서 거창한 거 같지만 서브컬쳐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사회제도나 분배 같은 것들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가 아니라 약자를 폭력으로 유린하지 말아라, 목적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지 말 것을 주장하는 데서 그친다.


사실 정의로운 주인공이라고 해서 정의의 편으로 나와서 악당을 물리치며 '정의가 승리한다' 라고 외치는 막연한 이미지를 떠올리기 쉬우나, 대부분의 주인공은 자신을 정의라고 칭하지 않는다. 이는 그러한 행동이 자기 자신의 얼굴을 금칠하는 것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선한 인물이 선행을 하면서 '나야말로 천사지.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선한 거 같다.' 라고 자화자찬하는 경우가 없는 것처럼 생각 있는 창작자라면 정의로운 일을 해도 자기가 정의라고 자화자찬하는 주인공은 만들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정의라고 주장하는 대신에 주인공은 작중에서 더 간결하며 실천적인 행동을 하는데,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폭력을 휘두르는 강자에 맞서 약자를 보호하는 행동이 대표적이다. 사실 열혈형 주인공 중 상당수도 정의의 편에 해당하는 주인공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대표적으로 카미죠 토우마라든지..


요즘은 이에 반해 다크 히어로같은 소시민형 주인공이 많이 나오는 추센데 이는 히어로에 대한 반감이라기보다는 정의의 편인 주인공이 범람하면서 그러한 유형의 스토리가 식상해지면서 주인공의 유형이 다양화된 것이 이유일 것이다.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정의의 편인 주인공 역시 큰 인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란 이름으로 비열하거나 잔혹한 행위를 마다하지 않는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최종적인 적이 되는 경우도 있다. (원피스의 해군본부, CP9 등) 또는 그들에게 대립하여 '이긴 자가 정의다. 정의를 주장하는 건 멍청하다' 라는 주장을 하는 인물들도 나오는데 이를 기존의 서브컬처에서 말하는 정의를 비판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기존의 주인공들이 말하는 정의, 약자의 보호는 개인의 기본권 보호에 가깝다. 이는 사회계약과 관련된 부분이기에 이를 비판하려면 사회를 부정하고, 사회란 순수하게 약육강식을 추구하는 곳이라고 규정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상이란 그렇게 단순한 것만도 아니다. 또한 이긴 자가 정의가 된다는 주장의 경우, 세상이 승자와 패자만으로 양분되는 것도 아니므로 현실과도 어긋난다. '성공하면 쿠데타, 실패하면 반란' 이라지만 쿠데타로 권력자가 되도 타국의 눈엔 그냥 군벌이거나 독재자일 뿐이다. 인도인 700만 아사를 일으킨 처칠은 왜 아직도 영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가? 히틀러가 패배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범죄자로 낙인이 찍혔을까? 물론 정말로 세계를 정복했다면 한동안은 이북의 독재자처럼 영웅시되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정권이 과연 얼마나 유지될까? 다만 이와 비슷하게 미국의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을 예로 들수있다. 이 학살은 여지껏 사람들의 인식 속 멀리 벗어나있던 주제였고 2010년에 들어서야 미정부의 사과와 잘못을 인정받았다. 한때는 할리우드 같은 대형미디어들도 역사적 왜곡에 동참하였다.[8]


정의는 주로 배틀물이나 슈퍼히어로 코믹스(간단히 히어로와 다크 히어로의 관점)에서 시각과 실천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다. 대표적으로 슈퍼맨에겐 정의는 헌신과 어둠 속을 비춰주는 등불이며, 배트맨에겐 정의는 폭력이며 죄의 대가를 공정히 판단하는 천칭이다.


이러한 대립은 장갑악귀 무라마사에서도 주요 테마로 등장한다.미나토 카게아키와 아야네 이치죠우는 정의에 대한 관점 때문에 대립하게 된다. 전자에게 정의는 분쟁의 근원이며, 오만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쌍쇄로 독선에 빠지지 않게 하는데 집착하는데 비해 후자에게 정의는 사악을 끊는 것,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에게 응징을 가하는 것이다. 


또한 정의가 독선이라는 관점은 다나카 요시키의 작품인 아르슬란 전기에서 잘 들어난다.

이상가라 할 수 있는 나르사스는 정의는 유일하지 않고, 하늘의 별 만큼이나 다양하다고 말하며, 음모가인 자하크의 추종자의 스승은 정의는 자신 이외의 존재를 악으로 정할 때 성립된다고 말한다. 


김성한의 단편소설 <바비도>에서 '정의는 권력의 버섯이다' 라는 말이 잠깐 언급된다.


슈타인즈 게이트의 후속작 첫 에피소드인 '주지선상의 지킬'에서는 오카베 린타로가 '정의의 편' 알카파맨(...)이라는 괴악한 히어로 복장을 하고 정의의 편인 척 한다. 능력따위는 없지만 타임리프를 써서 결과를 바꾸면서 '정의의 집행자'를 연기하는데, 여기서 징벌적인 정의의 모순점들이 들어난다. 순서를 보자면... '텐노지 나에'가 원하는 게임 소프트를 아침 일찍 판매하는데, 어떤 중2병환자들이 새치기하고 다 털어간다. 타임리프해서 다시 원래대로 되돌린뒤 그들을 쫒아내는데, 쫒아내고 보니 그들은 일일알바로 사재기 알바에 가담했던것. 알파카맨 덕분에 그들은 돈이 없고, 그래서 그들은 무전취식을 해야만 했다. 무전취식하면서 스턴건으로 오카베 린타로의 지인을 피해 입혔는데, 그것을 용납못하고 또 타임리프해서 그들을 막았다. 막은 뒤에 그들 역시 불쌍한 입장이었다는 것을 알게되고, 사재기 그 자체를 엿먹이면서 그 중2병환자들의 알바비는 얻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 사재기 한 사람들 역시 '라운더'라는 어두운 조직의 상납금을 바쳐야하고, 안 그러면 목숨이 위험했던것. 덕분에 오카베 린타로의 지인이 사재기의 원흉이어서 오카베 린타로는 자신의 지인의 자살을 알게 된다. 누군가를 벌하면서 그 누군가 역시 피해자가 되는 아이러니함을 보여준다. '정의'의 또 다른 반대편이 '악'이 아닌 '정의'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참고 - 정의의 편, 신세계의 신


2. 定義, definition[편집]


상위항목: 논리학 관련 정보


어떠한 개념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 그렇게 의미가 규정된 개념들이 학문의 기초가 된다.


"정의를 영어로?" 라는 질문에서 justice가 아닌 definition이라고 하면 수학과 출신이라는 농담 아닌 농담도 있는데, 실제로 수학 쪽에서 정의를 많이 사용한다.[15] 예를 들면 '한 내각의 크기가 직각인 삼각형을 직각삼각형이라 한다.' 같은 것들. 학습자의 수준레벨이 올라감에 따라서 수학에서 사용하는 어떤 용어의 정의가 점점 복잡한 개념으로 바뀌기도 하므로[16] 평소에 공부를 해놓지 않으면 헬게이트가 열릴 수 있으니 주의.


참고로 정의는 하나의 약속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정의에 대해서라면 옛날 서당에서처럼 단순무식하게 토씨 하나도 안 틀리게 외우도록 때려박는 교수법도 절대로 문제있는 교수법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로그의 정의를 보자. 양수 a, b에 대해 a^x=b를 만족하는 x의 값을 log'a'b라고 했는데, 이것에 대해서 의아해한다면.. [17] 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정의 자체는 암기해야 하지만 왜 이러한 새로운 정의, 개념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교육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의 입시수학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자세히 보면 교과서에도 좀 나와있지만 수업시간에는 왜의 부분은 넘어가고 개념정리와 문제풀이를 다루게 되고 그게 또 입시에 효율적이니깐... 수학교육과정 전체의 체계, 연관성을 알지 못하고 왜 이러한 단원을 배워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면 수학에 대한 흥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상위권이나 수학에 관심많은 학생들은 알아서 그런 것을 어느정도 체득하기도 하고 그런거 없어도 흥미를 유지하긴 하지만 학교교육은 결코 상위권이나 특별한 적성과 재능을 가진 학생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대부분의 평범한 학생들에 더욱 타켓을 맞춰야 한다. 결국 일종의 수학적 스토리텔링의 부재가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한국의 수학 교육과정은 어렵기도 하지만 상당히 체계적이고, 많은 개념을 다룬다. 입시위주 교육 때문에 다 묻혀 버리긴 하지만.


종종 수학이나 물리학 말고는 정의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정의는 과학 전반에서 모두 중요하다. 오죽하면 많은 연구자들이 용어의 정의를 엄밀히 내리지 않는 것을 유사과학의 기준으로 삼아도 된다고 여길 정도.[18] 


수학이나 자연과학처럼 엄밀과학이 아닌 사회과학, 그리고 아예 과학이 아닌 인문학에서도 정의는 무척 중요하다. [19]


사실 인문학은 물론이고 사회과학에서는 엄밀과학들과 달리 정의를 제대로 내리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학술적으로 엄밀히 정의하거나 조작적으로 정의하는 것도 어렵고, 억지로 한다고 해도 실용성이 없게 된다. 또한 엄밀과학과 달리 정의가 조금 부정확하다고 해서 당장 컴퓨터에서 에러를 발하거나 실험결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지는 않으므로, 일류 인문학자나 사회과학자라고 해도 저서에서 엄밀과학 수준으로 정의를 제대로 지키지는 않는다. [20] 하지만 이렇기 때문에 정의가 더 중요해지기도 한다. 정의를 엄밀히 내리는 것도 어렵고 실용적이지 않다 보니깐 정의를 명확히 하지 않고 용어를 다의적으로 사용하거나 일상적 의미와 학문적 용어를 섞어 쓰므로, 논쟁에서 정의만 명확히 해도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서로의 입장 차이를 명확하게 할 수 있으며, 복잡한 사실관계의 문제에서 단순한 윤리적, 가치적 판단의 문제에 가까워지도록 논증을 최대한 많이 환원시킬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유용한 결과를 가져다준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논쟁을 보자.


A : 민주주의는 최고의 정치체제야.

B : 뭐라고? 우리나라 국회의원들과 국민들 하는 꼴을 보고도 민주주의가 최고의 정치체제라는 소리를 해?

A : 아니, 내가 말한 것은 자기에 의한 지배라는 원칙적 의미에서의 민주주의야.

B : 아하 그렇구나. 그럼 동의해. 근데 그렇다 쳐도 지식이 부족한 대중들에게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게 하는 것이 꼭 좋지는 않으므로 엘리트들이 통치해야 한다는 의견도 일리는 있어 보이는데...(어쩌구저쩌구)


위 논쟁에서 A와 B는 처음에 좀 다르게 정의한 민주주의의 개념을 사용해서 쓸데없는 대립을 하게 되었다.[21] 이런 경우는 매우 흔하다. 이런 헛된 부분을 걷어내면 민주주의의 본래적 의미에 대한 논쟁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많은 학문에서 어떤 새로운 개념을 논의할 때에는 반드시 그 정의부터 체계적으로 짚고 넘어가며, 어떤 개념의 정의에서 합의를 보기 위해 학자들끼리 모여서 입씨름을 한다.[22] 많은 전공서적들도 그 후반부에는 용어 해설 목록(Glossary)을 두어서 각 개념들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일반인들도 논쟁을 하거나 보고 판단할 때 용어와 단어 뜻 하나하나를 파고드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태도이다. 지엽적으로 말꼬리 잡기 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유사과학자들이나 좆문가, 일반인들은 그러한 엄밀한 정의가 결여된 일상적 의미만을 가지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종종 그 의미가 바뀌기도 한다. 물론 이런 경우가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진화나 에너지의 의미를 꼭 과학적인 의미에서 사용할 필요는 없으며 일반인들에게 통용되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도 엄연히 언어의 사회성에 비추어 보아 의미있고 효율적인 행동이다. [23] 다만 엄밀한 학문적 논의를 할 때에도 그렇게 하면 혼동과 혼란, 나아가 사이비들이 나오게 된다.


한 예로 "인지부조화" 는 일반인들 및 흔한 네티즌들에 의해 거의 정신승리에 가깝게 이해되고 있지만, 이러한 이해는 사실 천부당만부당한 것이다. 개인의 인지된 자기개념(self-concept)과 그것에 위배되는 개인의 행동의 충돌에 대해서 개인이 느끼는 주관적 불편감을 인지부조화라고 한다.


2.1. 사전적 정의[편집]


국어사전에서 통하는, 가장 일반적이지만 가장 보수적인 정의. 일상적인 표현들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학술적 개념을 사전적 정의를 통해 이해하고자 한다면 여러 모로 어려움이 따른다. 일례로 "종교" 에 대해서 국어사전에서 말하는 정의를 들이댄다면 당장 종교사회학의 뒤르켐주의 학파 등에서 뛰는 학자들이 뒷목을 잡을 것이다.(…)


사전적 정의는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굉장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사랑' 의 사전적 정의 논란으로, 이성애 중심적인 언어가 성 소수자들을 차별한다는 지적에 따라 사랑의 의미를 바꾸고자 시도하였으나 이것이 종교계의 반발로 다시 되돌아갔던 적이 있었다.[24] 사전적 정의 자체는 변동할 수는 있지만, 이 사례에서 보듯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공식적 권위가 부여되어 있는 약속이라는 점에서 법적인 정의와도 유사할 수밖에 없다. 특정 집단 내에서도 그 집단에서 독점적 권위를 부여해주는 경우에는 이러한 정의와 일맥상통한다.


2.2. 학술적 정의[편집]


"과학의 용어가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 용어와 같다는 바로 그 사실이, 종종 우리를 이해시키기보다는 더욱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Often the very fact that the words of science are the same as those of our common life and tongue can be more misleading than enlightening.)

-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시민법에서 모든 정의는 위험하다: 전도(顚倒)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적기 때문이다."

(Omnis definitio in iure civili periculosa est: parum est enim, ut non subverti posset.)

- 야볼레누스(Iavolenus)[25]


전공서적 및 세부 분야에 대한 백과사전에서 통하는, 그 분야 연구자들 사이에 일반적으로 통하는 정의로, 대학생 이상에서는 이제부터 학술적 정의에 익숙해지게 된다. 여기서부터 이제 평범한 용어들도 엄밀히 정의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데, 특이하게도 자연과학이나 공학분야에서는 주로 수식을 활용해서 정의하게 된다.


여기 그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물리학 - 일(Work) : 어떤 물체가 직선을 따라 일정 변위만큼 이동하고 있고, 일정한 힘이 변위와 동일 방향으로 작용할 때, 일정한 힘에 의한 일(W)의 크기는 힘의 크기(F)와 변위의 크기(s)의 곱과 같다. 즉, "W=Fs" 가 성립한다. [26]


생물학 - 진화(Evolution) : 어떤 생물 집단 내의 유전자풀이 세대를 거치면서 변화하는 현상.[27]


심리학 - 발달(Development) : 생명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전생애(lifespan)에 걸친 모든 신체적,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변화의 양상과 그 과정.[28]


이 때문에 평범한 일반인들은 종종 과학자나 전문가들의 용어들을 오해하기도 하고, 이러한 간극은 유사과학자들이 날뛰기에 적합한 환경을 조성하기도 한다. 이러한 것은 학술적 토론에서는 철저히 지양되어야 하지만, 일반인들이 일반적 의미로 사용할 경우에도 그것을 틀린 것 취급하는 것은 역시나 오만하며 언어학적으로 그릇된 태도이기도 하니깐 역시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29] 이를테면 법학에서 선의와 악의를 대중과 다른 의미로 사용하지만, 그렇다고 대중들에게 법학적 의미의 사용법만을 강조한다면 헛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실제로 선의와 악의는 대중적 의미와도 너무 떨어져 있는 편이라서(유래적인 관계는 있다) 잘못된 용어라고 욕을 많이 먹는다. 근데 대체어도 딱히 없고[30] 계속 쓰여 와서 그냥 쓰인다..


교육수준이 높다거나 많이 알려졌거나 해서 과학용어 자체가 대중화된 경우는 원래의 어원적 의미가 사라지고 과학적 의미로 사용되는 예외들도 생긴다. 한국에서는 외국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는 보통 이런 경우가 많으며, 보통 특정한 현상이 아니라 특정한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인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비타민이나 쓰나미, 혹은 암 같은 용어는 일반인들도 과학적 의미와 동일하게 사용한다. [31] 비유적으로 쓰이는 경우는 좀 다른 경우이니 관계가 없다.


같은 단어라 할지라도 학문분야에 따라서 그 개념적 정의가 굉장히 엇갈리는 경우도 꽤 자주 있어서 주의가 필요하다. 위에서 예로 든 "Development" 같은 경우가 한 사례인데, 이 단어를 심리학에서는 발달이라고 이해하지만 국제관계학에서는 개발이라고 이해한다. 마찬가지로 "self" 라는 단어 역시 심리학에서는 자기로 번역하지만 생리학에서는 자신이 아닌 것(non-self)에 대응되는 의미에서의 "자신" 으로 통하고 있다.


수학에서 정의의 중요성은 well-defined 문서를 참고.


2.3. 조작적 정의[편집]


논문에서 통하는, 실험 등을 통한 어떤 개념의 규명이나 그것의 양적인(quantitative) 측정을 위해 임의로 및 암묵적으로 제시한 정의이다. 이제 이쯤 되면 일반인들의 이해와는 억만광년 정도로 멀어진 정의가 등장하며, 그 연구방법론에 있어서 적합한 방식으로 정의되곤 한다. 그렇다 해도 그렇게 크게 들쑥날쑥하지는 않은 듯.


예를 들어 당장 "속독" 을 정의한다고 가정하자. 도대체 어디부터를 속독이라고 불러 줘야 좋을까? 1분에 몇 자 정도를 읽어야 속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1시간 후에 얼마나 많은 양을 회상해야 속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두 가지를 결합해서 정의할 수 있을까? 이 모든 부분들을 세심하게 고려하여, 각각이 모두 객관적이고 양적으로 측정 가능하도록 엄밀하게 조작한 정의가 바로 조작적 정의라고 이해하면 대충 비슷하다.


예를 들어, 대중적으로 널리 활용되는 표현인 "분노" 를 위의 세 가지 방식을 따라 나란히 놓으면 대략 아래와 같을 것이다. 나무위키가 항상 그렇듯, 이하의 내용 역시 온전히 전문적인 것은 아니므로 양해를 구한다.


사전적 정의


분노 : [명사] 분개하여 몹시 성을 냄. 또는 그렇게 내는 성. (유의어 : 격노, 격분, 노여움)


학술적 정의


분노 : 정서심리학에서, 외부 환경적 자극이 즉각적 위험단서를 갖고 있지 않음을 가정할 때, 그 자극으로 인해 초래된 상황이 부당하다고 인지하고 있으며, 상황에 대한 지각된 통제감(perceived control)이 높은 상황에서, 그 자극에 대한 일련의 행동 및 안면 근육의 변화를 촉발하는 정서 상태.[32]


조작적 정의


분노 : 삼각검증(triangulation)을 활용하여, 실험 참가자에게 중성자극과 실험자극을 시각적으로 제시하였을 때 점-탐지 과제(dot-probe task)에서의 유의한 차이, 교감신경계(SNS)에 의한 코르티졸 각성 반응(CAR)의 유의한 차이, 마지막으로 참가자의 하박 피부전도반응(GSR)에서의 유의한 차이를 종합하여 그 차이가 ∼∼∼ 이상의 소견일 경우에 참가자가 분노하였다고 정의한다.

3. 旌義[편집]


대한민국/지명


지금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부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현. 1416년에 현으로 설치되어 1914년에 제주군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중심지는 현재의 표선면 성읍리이다.


지금의 성산읍·표선면·남원읍·대륜동·동홍동·서홍동·송산동·영천동·정방동·중앙동·천지동·효돈동[33]이 옛 정의현의 영역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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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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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朴槿惠[2], 1952년 2월 2일 ~ )는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이다.[3][4]


제5·6·7·8·9대 대통령 박정희와 육영수 사이의 장녀이다. 본관은 고령이다. 1963년 아버지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 이후 청와대에서 성장하였다. 1970년에 서강대학교에 입학하여 1974년에 졸업한 이후 프랑스 그르노블대학교로 유학을 떠났으나 1974년 모친 사후 귀국하여 1979년 10.26 사건 이전까지 사실상 영부인 직무를 대행하였다. 아버지가 서거한 후 청와대에서 나와 육영재단 이사장과 정수장학회의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98년 정계에 입문하여 4.2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고 이후 제19대까지 5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한나라당의 대표최고위원을 역임하였으며, 2007년 한나라당의 제17대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지만 이명박에게 석패하였다. 이후 이명박 정부 기간 동안 한나라당 내 비주류계를 이끌었다.


2011년 12월부터는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내며 당 혁신 작업을 지휘하였고 2012년 제19대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새누리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어 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8대 대선에서 51.6%의 득표율로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 득표율 48.0% 보다 많은 과반수의 득표로 당선되었다.[5]


2013년 2월 25일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이로써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1987년 대한민국 헌법 개정 이후 최초의 과반 득표 대통령, 최초의 이공계 출신 대통령, 최초의 독신 대통령, 부녀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6]


2016년 12월 3일 헌법과 법률 위반으로 인하여 대한민국 국회에 《대통령(박근혜) 탄핵소추안》이 발의[7]되었고, 12월 9일 국회에서 가결되어 대통령 직무가 정지됨으로써 대한민국 헌정사상 두 번째로 탄핵소추가 가결된 대통령이다.[8]


생애

생애 초반

출생과 초기 활동

박근혜는 1952년 2월 2일에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 1가 5-1번지에서 전시(戰時) 대구 주재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작전차장 박정희 대령과 중등학교 교사 출신인 그의 부인 육영수의 딸로 태어났다. 현재 이 삼덕동 1가에는 돈부리집이 있는 상가가 위치해 있다.[9] 어머니 육영수에게는 첫 소생이었으나 아버지 박정희는 이혼 경력과 전처소생의 장녀 박재옥이 있었으므로 박정희에게는 차녀가 된다. 여동생 박근령과 남동생 박지만이 있다.


아버지 박정희는 1917년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에서 소작농 박성빈과 부인 백남의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구미공립보통학교(현재의 구미초등학교), 대구사범학교(현재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를 거쳐 만주군관학교 예과와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만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중위 때 해방을 맞아서 귀국, 국방경비사관학교(현재의 육군사관학교) 제2기로 임관하여 재직 중이였다.


어머니 육영수는 충청북도 옥천군의 대지주인 육종관과 부인 이경령의 차녀로 태어나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현재의 배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현재의 옥천여자중학교)에서 가정과 교사로 1년 반 동안 봉직한 경력이 있었다. 외조부 육종관은 딸이 과거 혼인 경력이 의심스럽고 가난한 군인에 불과한 박정희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박정희와의 결혼 결심을 굳힌 육영수가 어머니 이경령, 동생 육예수와 함께 박정희가 있는 대구로 가서 결혼식을 강행하였다.


박정희는 소령이던 1949년, 여순 사건에 따른 숙군 여파로 육군 특무대(현재의 국군기무사령부)의 가혹한 고문끝에 남조선로동당 가입 혐의로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파면되어 육군 정보국에서 직제에도 없는 문관으로 근무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의 발발로 인해 가까스로 복직하고 대구사범학교 후배이자 부하 장교인 송재천(육영수의 이재종오빠)의 소개로 만난 육영수와의 재혼에 따른 안정기를 구가하던 시절이 박근혜가 태어난 무렵이다. 한국 전쟁이 휴전에 들어가자 군인인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전라남도 광주시, 서울특별시에 거주하며 유년기를 보냈다.


5·16 군사 정변에 관한 박근혜의 회고

1961년 5월 15일 오후 10시 경, 거사를 위해 집을 나서려던 육군 제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에게 부인 육영수가 "근혜 숙제 좀 봐주세요."라며 가족간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면담을 에둘러 요구하였다. 이에 박 소장은 잠시 방에 들러 숙제를 하고 있던 초등학교 5학년생 박근혜와 곁에서 잠든 장모 이경령과 3녀 근영, 장남 지만을 훑어본 뒤에 집을 나선다. 이 때 "무슨 숙제입니까?"라는 거사 동지 장태화의 물음에 박정희는 "어, 뭐 그림 그리는 거야!"라고 답한다. 하지만 박근혜는 아버지의 기척은 알았으나 자신이 무슨 숙제를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후술하였다.


"그날 아버지께서 들어오셔서 저를 한번 보고 나가신 것은 기억나는데요. 무슨 숙제를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아요. 어머니께서는 집안을 정리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날은 집안이 평소와 다르게 긴장되어 있었으나 저는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하니 어머니께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주변을 정리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학창 시절

서울장충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64년 2월 졸업하였으며, 정몽준 전 국회의원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그의 초등학교 동창이다.[10][11] 그 뒤, 카톨릭계 미션스쿨인 성심여자중학교를 거쳐 성심여자고등학교로 진학하였으며, 1970년 서강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과에 진학하여 1974년에 졸업하였다. 같은 해 프랑스 그르노블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청년기

귀국과 퍼스트 레이디 대행

프랑스 유학 중이던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 행사에서 어머니 육영수가 재일 한국인 문세광의 저격으로 살해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였다. 육영수 사후 아버지 박정희는 재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영부인 역할을 대행하여야 하였다. 1975년부터 박정희가 추진한 새마을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때 최태민이 그의 새마을 사업에 참여한 것이 후일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의전상의 영부인 권한대행으로써 아버지 박정희의 공식 행사와 해외 순방 등을 수행하였고 육영수 피격 사건 이듬해에 만들어진 육영수여사추모기념사업회 이사가 되었다.


박정희 피격 이후

 10·26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79년 10월 26일 아버지 박정희가 살해당하자 며칠 뒤 청와대를 떠나 동생들을 데리고 서울특별시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박정희 피격 당시 슬퍼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때 전두환에게서 아버지 박정희가 남긴 통치 자금 6억 원을 수령하였는데 이 사실은 박근혜의 정계 입문 이후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1980년 한국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냈고, 1982년 육영재단 이사장, 1994년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82년 박근혜는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고, 최태민도 육영재단에 합류하였다. 이후 박근혜와 최태민은 함께 1989년 육영수를 추모하는 단체인 근화봉사단을 조직하였고, 박정희와 육영수를 추모하는 월간 신문인 근화보도 발행하였다. 1년 뒤인 1990년 9월 근화보는 1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였고, 박근혜와 여동생인 박근영과의 육영재단 운영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박정희, 육영수 숭모회는 다툼의 원인은 최태민이 박근혜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육영재단의 운영을 전횡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육영재단의 간부는 1987년 9월 2일 어린이회관 노조원들이 외부세력 물러가라며 1주일 동안 농성하였던 것은 최태민을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특별한 직책도 없으면서 육영재단 운영을 좌우해온 최태민을 싫어하면서도 박근혜와 막역한 관계 때문에 어느 누구도 기를 펴지 못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박근혜는 1990년 11월 육영재단 이사장 퇴진 기자 회견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내가 누구에게 조종을 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다, 최 목사는 88년 박정희 기념사업회를 만들 때 내가 도움을 청해 몇 개월 동안 나를 도와주었을 뿐이다.[12]

이 때 박근혜의 여동생과 남동생인 박서영과 박지만은 최태민이 언니인 박근혜를 속이고 있으니 구하여 달라며, 당시 대통령이던 노태우에게 A4용지 12장 분량의 편지를 보냈다.[13]


최태민은 1994년 사망하였으며, 이후 박근혜는 언론에서 최태민에 대하여 '저에게는 고마운 분'이라며 두둔하였다. 이에 논객인 조갑제는 '박대표는 한번 믿어버린 사람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평가를 안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라고 말하였다.[14]


10·26 사건 이후 사회 사업

1980년 구 민주공화당 인사들과 유신정우회 인사들이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고, 1987년에는 김종필을 중심으로 신민주공화당이 출범하였으나 박근혜는 참여하지 않았다.


1982년 박근혜는 육영재단, 1994년 정수장학회 등을 인수하여 운영하였다. 이후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정치적 발언은 삼가하며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 일에 전념하다가 1998년에 이회창의 정계 입문 권유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그러나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 영남대학교 재단 운영 과정에서 비판이 있었고 후일 그가 한나라당 대표나 2007년 유력 대선 주자로 나올 때마다 비판이 제기되었다.


정치 활동

정계 입문

박근혜는 1997년 12월 2일 사촌 오빠 박재홍의 소개로 한나라당의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였던 이회창과 만났다. 이후 1997년 12월 10일 제15대 대통령 선거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이회창의 권유로 1998년 4월 2일 한나라당의 후보로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점과 미혼 여성 정치인이라는 점 등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출신 성분은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보수 진영 및 영남, 어머니인 육영수의 고향인 충청 지역의 지지를 얻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이후 2000년 한나라당의 부총재로 선출되었지만 2002년 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회창을 비판하며 한나라당에서 탈당하였다. 이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15] 하였으나 대선 전에 복귀하였다. 2002년 5월 1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 5월 1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회담을 하고[16] 5월 14일 서울특별시로 돌아왔다.[16]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과 당 대표

2004년 3월 12일, 한나라당이 다수(133석/273석)이던 제16대 국회에서 한나라당은 새천년민주당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 소추하였다. 박근혜도 당론에 따라 탄핵안 발의와 가결에 참여하였다. 비슷한 성향의 언론과 학계의 지원이 있었으나 극심한 역풍이 불면서 대다수 국민의 반발을 샀고 한나라당은 최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제16대 대선에서 불법 정치자금을 SK그룹 등으로부터 수수했다는 이른바 차떼기 사건이 불거지면서 한나라당의 지지도는 유례없이 급락해 최병렬 대표마저 사퇴하게 된다.


한나라당이 '역풍 위기'에 처했을때, 착실하게 당 내에서 입지를 쌓고 있던 박근혜가 그의 뒤를 이어 3월 23일 당 대표가 되었다.[17] 기존의 다선 의원, 중진 의원, 운동권에서 포섭해 온 세력 등과 다르게 박근혜는 여러 차례 기자 회견을 통해 국민에게 사죄를 표명했다. 이후 제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원내 1당의 자리는 내주었지만 121석을 차지하여 예상 외의 선전을 하였다. '탄핵 역풍 위기'에서 박근혜가 한나라당을 구해낸 것이다. 이때부터 박근혜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하면서, 잠재적 차기 대권 주자로 부상했다.[18]


6월 13일 오전 신라호텔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5주년 기념 학술 회의에 다녀오기도 했다.[19]


2005년 12월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직권상정하여 처리하였다. 당시 대표인 박근혜는 곧바로 장외 투쟁을 선언하고 거리로 나섰다. 당시 한나라당 내부에조차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 "한나라당이 무슨 장외 투쟁이냐"라는 비아냥도 있었고, 국회 등원에 대한 여론의 압박도 심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표는 장외 투쟁을 계속했고, 결국 여야는 한나라당의 장외 투쟁 3개월 만에 사학법 재개정 논의에 합의하게 된다. 박근혜 대표는 주변의 반대와 원외 투쟁에 소극적인 한나라당의 체질이라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학법 재개정을 이끌어낸 것으로 평가되었다. 2004년 17대 총선의 '한나라당 천막 당사' 역시 "쇼 아니냐"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의 상징물로 기억됐다.[20]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승리를 위한 한시적인 대표가 될 것이라는 일부 예상을 깨고 오랫동안 대표 자리를 지켰다.


박근혜 피습 사건

2006년 5월 20일 지방 선거 유세 중 지충호가 휘두른 문구용 칼에 피습당하여 안면에 깊은 자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당원들에게 선거 판세를 물어보는 모습을 보여 오히려 당 안팎에서 높은 지지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 지충호는 이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이 사건은 2006년 5월 20일 박근혜가 경기도 군포와 인천 지원 유세를 마치고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지원유세에 참가하던 중 19시 20분쯤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서 지방선거 지원유세를 벌이다 지충호에게 피습당해 얼굴을 크게 다친 사건이다. 지충호가 휘두른 흉기는 10 cm 가량의 커터칼이다. 당시 지충호는 인천에서 버스를 타고 신촌까지 온 뒤 범행을 위해 4시간을 기다린 후 오세훈 서울시장 지원연설을 위해 단상에 박근혜가 오르는 찰나 지충호는 자신이 가진 커터칼로 11센티미터의 길이에 걸쳐 박근혜의 턱을 그었다.[21] 당시 대전광역시장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박성효 후보는 열린우리당의 염홍철 후보에게 지지도에서 뒤지고 있었다. 그런데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직후 박근혜가 '대전은요?'라고 선거 판세를 물어본 것이 알려지면서 판세가 역전되었고 이후 지방 선거에서 박성효 후보는 염홍철 후보에게 근소하게 승리하였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2007년 4월 미국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면담을 가진 박근혜

2004년부터 한나라당의 위기와 재도약을 이끈 박근혜는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예비후보 중 하나였다. 박근혜는 한나라당의 당권과 대권의 분리 방침에 따라 2007년 대선을 1년 남긴 2006년 6월 16일에 대표직을 사퇴하고 대선 레이스에 돌입하였다. 박근혜의 가장 큰 상대는 서울특별시장을 지냈으며, 그 과정에서 청계천 복원, 버스 노선 개편 등으로 인기를 끈 이명박이었다. 본격적인 대선 경선 레이스가 시작되고 박근혜는 이명박의 부패 비리 의혹을 집중 제기하였다. 이 과정에서 BBK 주가 조작 사건 등이 처음으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박근혜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 나와 '줄푸세'라는 정책을 내세웠다. '세금은 줄이고, 각종 규제는 풀고, 법기강은 세운다'는 뜻으로 그의 대통령후보 경선시 주요 정책구호였다. 이 정책은 그녀의 보수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대표적 정책이라는 평가가 있다. 자유주의(liberalism)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정확히는 신분제 등으로부터 억압받는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던 '고전적 자유주의자(liberalist)'라기보다는, 분배보다 성장을 중시하고 각종 규제로부터 억압받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자(neo-liberalist)'에 더 가깝다는 평가가 있다.[22] 이는 이후 제17대 이명박정부의 정책에도 많이 반영되었다.[23]


2007년 7월 검증 청문회를 받았다. 이때는 그동안 박근혜가 정계 입문 이후 제기되어왔던 각종 의혹이 모두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전두환 자금 6억 원 수수설 등 일부는 시인했으나 일부는 부정, 비판하였다. 이를 두고 곤란한 질문에는 이리저리 답변을 피하였다[24] 는 언론의 비판도 있었다.


열린우리당 윤호중 대변인은 이날 국회 브리핑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돈이 9억이 아니라 6억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을 빼고 하나도 새롭게 검증된 것이 없는 청문회였다"면서 "국민이 궁금해 하는 후보의 자질의혹을 검증하기보다 면죄부와 해명 기회만을 준 시간이었고 후보자의 맷집만 훈련시킨 청문회였다고 평가한다"라고 주장했다.[25] 민주노동당 김형탁 대변인은 "정치쇼에 불과하다"면서 "하나마나한 청문회, 시간낭비, 전파낭비일 뿐"이라고 깎아 내렸다.


폭로전은 경선 때부터 시작되었다. 전당 대회를 3일 앞둔 2007년 8월 17일, 박근혜 경선후보는 "거짓으로 한나라당이 과연 집권할 수 있습니까?"라고 발언하기도 했다.[26] 이명박 후보측은 도곡동 땅에 대한 검찰 발표가 판세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자체 조사와 각 언론사 조사를 종합할 때 10% 이상 차이로 낙승할 거라고 주장했다.[27] 이와 관련해 진수희 대변인은 "1위 후보가 압승을 해야 경선 후유증이 최소화 된다라는 생각이 확산되어 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우리가 15% 격차로 압승할 것으로 예상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27] 그러나 박근혜 후보측은 자체 전수 조사 결과 근소하게나마 앞서기 시작했다면서 각종 의혹으로 이 후보에 불안감을 느낀 당심이 옮겨온다고 주장했다.[27] 당시 세대별 지지율을 보자면, 이명박 후보는 3,40대로부터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를 얻은 반면, 박근혜 후보는 50대 이상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를 얻었다.[27]


박근혜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일반 당원,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경선에서 모두 승리하였지만, 1표를 실제의 5표로 환산한 여론조사에서 뒤져 이명박에게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했다. 표의 등가성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일었으나, 박근혜는 깨끗이 승복하였다.[28] 하지만, 논란의 연장선상으로 이후에 대선 후보 자리를 박근혜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29]


이명박 정부 시절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한나라당에는 친이명박 계열과 친박근혜 계열의 갈등이 있었다. 한나라당 내에서 친박계 의원들의 숫자는 2008년 5월 18대 총선 직후에는 당내외를 합쳐 50여명 정도였고, 2011년 6월 비공식적으로 90 ~ 100명 정도 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30]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이명박의 대통령 선거를 직접적으로 도와준 이재오, 이방호 등이 한나라당의 주요 직책을 맡았으며, 상대적으로 박근혜 계열의 정치인들은 홀대를 받았다.


2008년 총선에서 친이계의 이재오, 이방호 두 명은 적극적으로 이명박 계열의 정치인들을 후보로 내세우고, 공천에서 박근혜 계열의 정치인들을 대거 탈락시켰다. 박근혜는 이에 대하여 공천의 공정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수차례 비판하였으나 공천 결과에는 변함이 없었다.


박근혜는 이에 대하여 "한나라당 공천이 잘못돼 가고 있고, 기준도 없는데다 엉망"이라고 비판하였다. 또 "오로지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공정하게 해 달라고 했는데 BBK 이야기를 한 사람은 공천에 안 된다는 둥 살생부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는데 이것은 정말 아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이어 "지난 번에 경선에서 정치 발전을 위해 깨끗하게 승복했고, 한나라당에서 처음 제대로 경선을 한 것이 아니냐"며 "그로 인해 정치가 크게 발전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는데 잘못된 공천으로 그것을 다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이런 공천을 가지고는 앞으로 선거가 끝나도 한나라당이 화합하기도 힘들고, 힘든 상황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며 "정치 발전도 앞으로 기대할 필요가 없고, 한나라당의 발전도 기대할 필요가 없다"고 경고했다.


2008년 3월 12일 박근혜는 이명박 대통령과 현역 의원 50% 물갈이에 합의했다는 설에 대하여 "어마어마한 음모"라며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하였다. 박근혜는 "오늘 아침 기사를 보고 기가 막히기도 하면서 하다하다 이런 술수까지 난무하는구나라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며 "이 쪽(친박계)에 다 뒤집어 씌우는 것이다."라고 흥분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한나라당 이방호 사무총장이 우리 핵심 누구와 이야기를 했는지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끝까지 밝혀 내겠다"며 "이방호 사무총장이 친박계 핵심 인사가 누군지 못밝힌다면 영남권 물갈이를 50% 한다고 해 놓고 우리한테 다 뒤집어 씌우려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31]


박근혜는 2009년 이명박 정부가 세종시 수정 의견을 내자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한나라당의 친이계와 친박계의 계파 갈등이 더 확산되었다. 2009년 여론조사 결과 텃밭인 영남 지역, 중장년층, 보수층의 박근혜 지지 비중이 1 ~ 2% 낮아지고 진보층, 충청 지역, 기타 연령대의 지지 비중은 1 ~ 2% 높아진 걸 볼 수 있는데 이 까닭은 여권 주류가 마음먹고 세종시를 지원해 경상북도의 혁신도시가 기업을 유치하지 못하게 된다는 불안감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시 논란 이후, 지지율이 다시 회복되었다.[32]


박근혜는 정운찬 총리가 "자족기능 강화를 위해 세종시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고 하자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이 같은 비판은 10·28 재보선이 끝나자마자 정 총리가 세종시 수정 추진 행보에 속도를 붙이자 제동을 건 것으로 보였다.[33]


박근혜는 2009년 10월 31일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에서 기자들과 만나 "세종시는 국회가 국민과 충청도민에게 한 약속"이라며 "세종시 문제를 개인적인 정치 신념으로 폄하해선 안 된다"고 말하였다. 정운찬 총리의 면담 제안에 대해서도 "국민과의 약속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 모르고 하는 말"이라며 "설득하고 동의를 구한다면 국민과 충청도민에게 해야지 내게 할 일이 아니다"라고 일축하였다. "행정복합도시라는 말 속에 문화시설과 교육, 과학 등을 다 포함한 자족기능이 들어가 있는 것"이라며 "약속을 지키고 부족하면 플러스 알파로 더 잘되게 해야지 약속을 어기면 안 된다"고 지적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공식 세종시 수정 발언에도 불구하고 11월 27일 "할 말을 이미 다 했고, 입장(원안+알파(α))에 변함이 없다"며 기존 입장을 고수하였다.[34]


친박연대 창당

대한민국 정당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개인의 이름을 정당명으로 사용한 정당이 친박연대이다. 박근혜라는 개인의 이름을 정당명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개인의 이름을 정당명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시비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급기야 서청원, 홍사덕 등의 주도로 공천에서 탈락한 박근혜계 정치인들이 대거 탈당하여 친박연대를 창당하고, 다른 정치인들은 친박 무소속 연대를 결성하였다. 박근혜는 이들과 행보를 같이 하지는 않았지만 공천 결과에 대해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는 강도 높은 비판과 함께 "살아서 돌아오라"는 발언을 통해 간접적인 지원을 하였다.


박근혜는 한나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다시 당선되었고, 이재오, 이방호는 낙선하였으며, 친박연대는 지역구 6석, 전국구 8석이라는 예상 외의 높은 지지율을 달성하였다. 친박 무소속 연대도 총 12명이 당선되었다. 이후에도 박근혜는 꾸준히 친박연대 및 무소속 친박 당선자들의 복당을 요구하였다. 친박 측과 앙금이 남아있던 강재섭 대표의 임기가 종료되고 박희태 전 의원이 대표로 부임한 뒤 마침내 친박 무소속연대 소속 의원과 친박연대의 지역구 의원 전원이 한나라당으로 복당하여 한나라당 내 친박의원 의석수는 60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친박연대의 전국구 의원 5명은 당명 개정, 독자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고 양정례, 서청원, 김노식은 당선무효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되어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 시위가 있었던 2008년 6월 박근혜는 "근본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원론적인 얘기만 한 차례 한 뒤 줄곧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촛불집회가 본격적인 거리 투쟁으로 비화된 5월에도 그는 당을 떠난 친박 측근들의 복당 문제 얘기를 주로 했다. 이후 계속되는 복당 요구에 네티즌들의 의해 '복당녀'라는 별명이 생기며 비판받기도 하였다.


남북 관계 경색이 지속되자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박근혜는 '대북 특사론'의 유력한 인물로 꼽혔다.


또한 박근혜는 이명박 대통령의 유럽 특사로 임명되어 계파갈등이 해빙될 조짐이 보이기도 하였다.[35]


18대 국회의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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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침몰 사건과 연평도 포격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에서 2010년 6월 29일에 북한의 천안함에 대한 군사 도발 규탄 및 대응 조치 촉구 결의(의안번호 1808656)의 원안가결에 찬성하였다.[36]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에서 2010년 11월 24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의 대연평도를 향하여 170여 발을 포격하여 대한민국 해병 2명 및 대한민국 국민인 민간인 2명을 살해한 연평도 포격을 규탄하기 위한 북한의 무력도발행위 규탄 결의안(의안번호 1810030)을 찬성하였다.[37]


탈북자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에서 2010년 3월 2일에 탈북자들을 위한 지역적응센터, 상담사제도,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 설립등을 위해 발의된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대안)(의안번호 1807771)에 찬성하였다.[38]


복수 국적 문제 관련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에서 2009년 12월 29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혼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결혼 이민자, 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거나, 우수 외국 인재로서 특별귀화한 자, 국적 회복 허가를 받은 자로서 특별한 공로가 있거나, 우수 외국 인재로 인정되는 자, 해외 입양 되었다가 우리 국적을 회복한 자, 그리고 외국에 장기 거주하다가 국내에 영주 귀국하여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한 65세 이상의 자들을 대상으로 복수 국적을 제한적으로 허용하기 위하여 발의한 국적법 일부개정법률안(의안번호 1807200)의 수정가결에 찬성하였다.[39]


재외국민 참정권 관련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에서 2009년 2월 5일에 대한민국 헌법 제24조에도 불구하고 해외에 거주하는 약 240만명 대한민국 국민의 금지되었던 재외국민 참정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발의된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 (의안번호 1803725), 주민투표법 일부개정법률안 (의안번호1803724), 그리고 국민투표법 일부개정법률안(의안번호 1800737)에 모두 찬성하였다.[40][41]


2010년 지방 선거와 대선 행보


박근혜 (2011년)

박근혜는 2010년에 있었던 지방 선거에서 대구광역시 달성군수로 출마했던 한나라당의 이석원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지만 이석원 후보는 무소속의 김문호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박근혜는 "달성군민이 판단한 것도 존중한다"고만 입장을 밝혔다.[42] 차기 대선 후보로써의 지지율은 사상 최저치로 떨어져 25.1%를 기록하는 등 박근혜의 정치적 입지가 점점 좁아지자[43] 박근혜는 2010년 하반기부터 차기 대선 행보에 초점을 두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12월 20일 열린 공청회에서 복지를 화두로 토론을 진행하였다. 박근혜는 인사말을 통해 "서구 선진국들의 전통적 복지제도가 한계에 이르렀다"며 맞춤식 생활 보장형 복지 국가를 제안하였다.[44] 이후 12월 27일 박근혜의 대선 구상을 내놓을 '국가미래연구원'이 출범했다. 출범식에는 대한민국 내 학자들과 이한구 한나라당 의원 등이 참석했다.[45] 그러나 심재철 한나라당 의원은 "복지를 늘리려면 세금을 더 거둬야 하는데 그 얘기는 감추고 무조건 복지만 잘해주겠다고 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태도"라고 비판했다.[46]


당 비상대책위원장과 당명 개정


그리스 외무부 장관 디미트리스 드루차스와 함께 한 박근혜

2011년 12월 9일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디도스 파문을 못 이기고 사퇴하자, 한나라당은 한나라당 전 대표인 박근혜를 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수락 연설에서 “집권 여당으로서 국민의 아픈 곳을 보지 못하고 삶을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한 데 대해 진심으로 사죄한다”며 “이제 바꿔야 한다. 그동안 한나라당과 우리 정치권 모두 국민만 바라보지 않고, 정치를 위한 정치를 해왔다”며 “정치권 전체가 국민의 불신을 받는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앞으로 더 큰 국가적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 말해 위기의 심각성을 강조하였다.


비상대책위원장 선출 1달 후인 2012년 1월 25일 박근혜는 당명 변경을 선언하였다. 새 당명 국민 공모 이후 2012년 2월 2일 박근혜는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변경하겠다고 선언하였고 2012년 2월 13일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이로써 한나라당은 14년 3개월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당의 당헌, 당규를 개정하였다. 이후 박근혜는 제19대 총선 대비를 하였고 3월 20일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총선을 22일 앞두고 중앙선거대책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9대 국회의원 시절

불안한 당내외 상황에도 불구하고 2012년 4월 11일 제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152석을 획득하여 과반 1당을 유지하였으며 그 후 공식적인 당 지도부가 출범하였지만 당내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대통령 후보 선출 방식 문제로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정몽준 전 대표, 이재오 의원과 대립하였고, 결국 정몽준 대표, 이재오 의원의 불출마 선언 속에 경선을 치렀다. 8월 중순 치뤄진 경선에서 박근혜는 압도적 지지로 승리하였다.



아테네에서 찍은 사진(2011년)

국회의원 재직 중 대선 경선을 맞이하게 된 박근혜는 대선 경선 캠프 선대위원장으로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 2항 '경제 민주화'의 입안자인 전 민주정의당 헌법개정위원 김종인을 임명하는 등 사회양극화 문제 해소에 적극적 의지를 보였다.[47] 박근혜는 재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보다는 경제력 남용을 바로잡는 데 방점을 뒀다. 재벌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긍정적 역할은 인정하자는 쪽이었다.[48] 사회양극화 해소가 목적인 경제민주화를 위해서는 세수확보가 중요한데 박근혜 의원은 2012년 7월 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법인세는 가능한 한 낮춰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을 야기했다. 우리나라 법인세 최고세율은 2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25.6%(지방세 포함)보다 낮은 편이다. 일본과 미국의 법인세 최고세율은 각각 39.5%, 39.2%에 이른다.[49] 현재 법인세는 내국세 총액 가운데 부가가치세(33.0%) 다음으로 높은 비중(28.6%)을 차지한다.[49] 강병구 인하대 교수(경제학)는 “법인세를 낮추겠다면 소득세나 부가가치세 등에서 ‘박근혜식 복지’에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것인지 대안을 내놔야 하는데 그게 안 보인다”고 지적했다.[49] '법인세 인하와 경제민주화 간의 모순성' 및 '법인세 감소분에 따른 대체 세수 확보' 등의 논란은 대통령 선거일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였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박근혜는 2010년 7월 10일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하였다. 2012년 7월 5일 이상일 캠프 대변인은 오전 10시에 영등포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기로 정하였다고 브리핑을 통하여 밝혔다. 이 대변인은 "각계각층 국민들이 다니는 열린 공간이라는 점이 고려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캠프명은 '국민행복캠프'로 정하였다고 이 대변인은 덧붙였다.[50]


당시 정몽준과 이재오가 당내 경선에 불만을 품으며 경선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박근혜는 2012년 8월 20일 새누리당 전당 대회에서 12월 19일 18대 대통령 선거에 나설 새누리당 후보로 선출되었다.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의 득표율은 전체 유효투표의 83.97%인 8만 6천 589표로 지난 2002년 경선 당시 이회창 후보가 얻은 68%인 기존의 최고 기록을 갱신하였으나 경선 투표율이 41%로 역대 최저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대한민국 정당 역사상 유력 정당의 첫 여성 후보이자 전직 대통령의 자녀가 대선 후보가 되는 첫 사례이기도 했다.[51] 한편 박근혜는 2002년 한나라당 제16대 대선 후보 경선 출마 선언 10년 후에 대선 후보로 선출되는데 성공하였다. 박근혜는 "준비된 여성대통령"을 모토로 내걸었다.


한편 경선 8일 뒤인 2012년 8월 28일 박근혜는 전태일재단을 방문하려고 했으나, 유족과 노동자들의 거부와 반대로 무산되었다. 전태일의 여동생이자 구 민주통합당 국회의원인 전순옥은 진정으로 전태일 정신을 생각한다면 쌍용차나 용산참사 희생자 등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먼저 찾았어야 한다고 말하고, 이른바 국민대통합에 대해서도, 정책적으로 접근을 하거나 현안이 일어나는 현장을 먼저 찾아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이야기하며 희망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전 의원은 현재의 진실은 미래에 대한 지향과 과거의 삶이 일치할 때 빛을 발하는 것이라며 5·16 쿠데타와 유신, 군사 독재에서 지금의 정수장학회까지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다면 지금의 말과 행동은 그 진실을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하였다.[52] 그러나 이상일 대변인은 "박 후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아무리 방해를 하고 장막을 친다 해도 국민을 통합하겠다는 박 후보의 행보를 막지 못할 것"이라며 "국민을 분열시켜 계층간, 세대간, 지역간 갈등을 조장하는 세력을 반드시 물리치고 국민대통합의 '100% 대한민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선거 기간 중이던 2012년 11월 22일 무소속 이건개 후보가 박근혜에 대한 지지를 선언, 사퇴하였다. 이튿날 무소속 안철수 후보 역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 단일화를 이뤄냈다. 이후 후보로 등록하였으며 기호 1번을 차지하게 되었다. 2012년 11월 25일 국회의원직 사퇴 기자회견을 갖고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이후 2012년 12월 10일 박근혜는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면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선언하였고, 국회의원직 사직서를 강창희 국회의장이 수리함에 따라 박근혜 후보는 15년간의 의정 활동을 마치게 되었다. 박근혜 후보는 안철수 전 후보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의 지지 유세를 함으로서 고비를 맞았지만, 지지층 및 여론의 굳건한 지지를 받으며 대선 기간 중 시행된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지속적으로 1위를 기록하였다. 한편 대통령 선거 후반에 국정원 여직원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민주통합당은 2012년 12월 11일 국가정보원 소속 심리정보국 공무원들이 국가정보원의 지시에 따라 인터넷에 게시글을 남겨서 선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공개했다. 이어서 해당 활동에 참여한 국가정보원 직원중 1명을 지목했다. 그러나 해당 직원은 오피스텔에서 경찰과의 대치 과정에서 나오지 않았고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경찰은 수사에 들어갔으나, 국가정보원 요원은 전화를 통해 자신이 항상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으며 대선과 관련한 어떤 글도 인터넷에 올린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53] 2012년 12월 13일, 해당 요원은 경찰청에 임의 제출 형식으로 자료를 제출하였지만[54] 경찰과 선거관리위원회의 휴대전화와 이동식 저장장치 제출요청은 거부하였다.[55] 한편 민주통합당은 해당 조직의 실체와 업무 내용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56]


한편 이른바 '국정원 직원 사건'에 대하여 새누리당 측은 반발하였다. 십알단(윤정훈목사가 운영하였다고 하는 새누리당측의 SNS 여론 조작 그룹) 연루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12월 13일 영등포구 여의도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새누리당 관계자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PC여러대로 작업하는 장면이 선관위에 의해 포착했다. 이곳에서는 박근혜 명의의 임명장과 새누리당 SNS 미디어본부장 명함이 발견됐다.[57]


박근혜 후보는 중앙선관위 주최의 대통령선거 후보자 TV토론회에 민주통합당 문재인,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와 함께 참석하였다. 당시 이정희 후보는 "박근혜 떨어뜨리려 나왔다" 등의 발언을 하는 등, 박근혜 후보에 대하여 노골적인 공격을 하였고, 시청자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선 후보 토론회에 지지율 1% 후보(이정희)가 참여하는 것이 적합한지에 대한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1차, 2차 TV 토론회에는 박근혜·문재인·이정희 후보가 참여해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선거 막판인 12월 16일 이정희가 후보 사퇴함에 따라 같은 날 오후 시행된 토론회에는 박근혜, 문재인 후보가 참석하였고, 양자토론을 가졌다. 이후 박근혜는 2012년 12월 19일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1577만 3128표를 득표하여 문재인을 누르고 당선되었다.[58] 박근혜의 임기는 2013년 2월 25일부터 2018년 2월 24일까지다.


대통령 재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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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사

취임식


박근혜가 취임식 날 국회의사당 앞을 지나가고 있다.

2013년 2월 25일 박근혜는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박근혜는 그 날 오전 0시를 기하여 이명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군 통수권 등 대통령으로서 모든 법적 권한을 인수받았다.[59] 이어 오전 10시 23년간 지내온 사저를 떠나 현충원을 참배한 뒤 취임식에 참석하였다.[59]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2013년 2월 25일 대통령 박근혜[59]

또한 박근혜는 취임사에서 경제 부흥과 국민 행복, 문화 융성을 통해 부강하고 국민이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천명하였다.[59]


외교 정책

미국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과 함께 한 박근혜(2013년)


미국을 방문한 박근혜 (2013년)

취임 후 박근혜는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 한편 보스턴 마라톤 현장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자 애도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한편 박근혜는 2013년 5월 미국을 방문하였다. 이후 박근혜는 북한 문제 등에 관한 내용에 대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회담을 하였고, 한미 동맹을 글로벌 동맹으로 발전시키는 '한미동맹 60주년 선언'등에 대하여 합의하였다.


방미 기간 중 청와대 윤창중 대변인이 여성 인턴에 대한 성추행을 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져 급히 귀국 조치되었고, 이후 이 사건은 매스컴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으며 논란이 되었다. 윤창중은 귀국 직후 해임되었다.


북한

2013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북불가침합의를 폐기하겠다고 발표하였다.[60] 북한은 또한 각종 미사일이 핵탄두를 장착한 채 대기상태에 있다고 위협했으며, 1991년 남북 불가침 합의 폐기와 판문점 남북 직통전화 단절을 선언하는 등 대한민국에 대하여 공개적인 적대행위의 의사를 밝히며 위협하였다.[60] 이에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우리 한국을 공격한다면 인류의 의지,대한민국은 당연하고 인류의 의지로 김정은 정권은 지구상에서 소멸될 겁니다."라고 주장하였다.[60] 국방부 또한 북한군이 대규모 훈련을 위해 집결한 상태라며, 만약에 공격할 경우 대응 규모와는 상관 없이 응징하겠다고 강조했다.[60]


그러나 2013년 9월에 대한민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WHO를 통한 840만 달러의 원조를 약속하는 등 인도적 지원은 유지되었다.[61]


이후,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2014년 3월 28일 드레스덴 선언을 발표하였디.


일본

박근혜는 2013년 4월 24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침략을 부인하는 등 우경화 노선을 취하려 하자, "역사 인식이 바르게 가는 것이 전제되지 않고 과거 상처가 덧나게 되면 미래지향적 관계로 가기 어렵다"고 말했다.[62] 이후 한국일보를 비롯한 중앙 언론사 편집국장 및 보도국장단과의 오찬간담회에서 "일본이 우경화로 가면 동북아와 아시아 여러 국가들 간 관계가 어려워질 것이고, 일본에도 바람직한 방향이 아닌 만큼 깊이 신중하게 생각해 주기 바란다"고 말했으며, "우리 세대의 아픔과 걸림돌이 후세에 이어지지 않도록 정리하고 끊어야 한다"며 "정부는 항상 일관되게 원칙을 가지고 한일관계를 풀어나가겠다"고 덧붙였다.[62] 이어 "미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기후변화와 테러방지, 원전 문제 등과 같은 비정치적 분야부터 신뢰를 구축하고 이를 토대로 다자간에 더 큰 신뢰를 구축하는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즉 '서울 프로세스'를 내달 미국 방문 때 논의할 계획"이라고 말했으며, "북한도 얼마든지 이에 참여할 수 있으며, 참여하지 않더라도 신뢰 쌓기 노력을 해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62]



대통령 전용기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박근혜

중국


중국을 국빈 방문 중인 박근혜

박근혜는 2013년 4월 21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쓰촨성 대지진에 관하여 "쓰촨성에서 20일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많은 인명 및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저와 대한민국 국민들은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다"라는 내용의 위로전문을 보냈다.[63]


2013년 4월 24일, 중국 외교부장이 윤병세 대한민국 외교부 장관을 만났으며, "관련국들이 적극적인 조치를 내놓아 문제를 대화와 협상의 궤도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64] 이어 중국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공정하고 책임있는 역할을 해나갈 것이라며,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안정,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의 원칙을 견지할 것이라고 밝혔다.[64] 나아가 중국은 박근혜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대한 지지 입장을 밝혔고, 대한민국이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노력을 기울이길 바란다고 밝혔다.[64]


유럽

2013년 11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초청으로 영국을 국빈 방문하였다. 또한 11월에 프랑스를 공식 방문하여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경제협력에 합의하였다.


경제 정책

박근혜는 "경제정책은 타이밍이 중요하다며, 일자리 창출과 서민생활 안정 위주로 적기에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야 한다."고 밝혔다.[65]


그녀는 4월 3일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 업무보고에서 경제활력회복과 세입정상화를 위하여 빠른 시일 내에 추경예산안을 편성하고, 이것이 국회에서 조속히 처리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65] 또한 주택시장 정상화 대책에 관련해 입법의 마무리와 수출·투자에 대한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하고, 중소기업을 위한 '엔저' 대책도 주문했다.[65] 그러면서 유통구조를 개선하여 서민 물가를 안정시키고 국민행복기금에 도덕적 해이와 형평성 논란이 없도록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65]


박근혜의 경제 정책 아젠다는 '창조 경제'이다.[66]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데다가 아는 사람들조차 제각각이여서, 논란이 되고 있다.[66]


통일정책

박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공식 언급[67] 한 이래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남북간 신뢰를 형성함으로써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며, 나아가 통일의 기반을 구축하려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68] 가 대표적인 통일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후 2014년 신년연설을 통해 "통일은 대박이다"[69] 라는 발언을 통해 통일에 대한 국민 관심을 크게 증가시켰다.[70]


또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 대한 구체적인 실현방안으로 2014년 3월 28일 독일 통일의 상징 도시인 드레스덴에서 인도적 문제해결, 남북한 공동 인프라 구축, 남북 동질성 회복 등 평화통일 기반 구축을 위한 3대 제안을 북한에 제시하는 '드레스덴 선언'을 천명하였다.[71] 이어 제69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박 대통령은 "통일 준비는 시대적 소명"이라면서 북한에 대해 하천·산림 관리 공동 협력 사업, 이산가족 상봉, 남북한 광복 70주년 공동기념 문화사업 준비 등 남북이 실천 가능한 사업부터 행동으로 옮기자는 작은 통일론을 제안하였다.[72] 2015년에 들어와서는 박 대통령이 신년사를 통해 광복·분단 70주년을 맞는 2015년에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통일 기반을 구축하겠다고 언급하였다[73]


1.12 신년기자회견에서 '남북 정상회담'성사 여부에 대해 "평화통일의 길을 열기 위해 필요하다면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며 적극적인 대화 의지를 거듭 밝혔다.다만 "비핵화가 해결이 안 되면 평화통일을 이야기할 수 없다"며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 간이나 다자협의를 통해 대화로 풀어나가자는 입장을 밝혔다 [74]


이와관련 북한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대결정책이며[75] 하였고 드레스덴 선언에 대해서도 이산가족 상봉이나 지원에 따른 인도주의적 문제 해결이 북남관계 개선의 선차적인 고리가 아니라 정치군사적 대결상태 해소가 최우선이라며 맹비난하였다[76] 또한 8.15경축사에서 제안한 대화 및 협력에 대해서도 금강산 관광객 총살이나 천안함 및 연평도 도발에 대한 사죄없이 5.24 조치 해제 등 대북정책 기조전환을 압박했다.[77] 2015년이 되자 김정은은 탈상 3년을 계기로 고위급 접촉 재개는 물론 남북 정상회담도 못 할 이유가 없다고 신년사를 밝힌 데 이어[78] 1.20 북한 정부·정당·단체 연합회의에서 채택한 남북 대화 촉구 호소문을 청와대, 대한적십자사 등에 보내면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대북전단 살포 중단 및 한미훈련 중단 등 한국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걸었다[79]


취임 1년차 (2013년 2월 ~ 2014년 2월)


2013년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에서 연설 중인 박근혜

2013년 2월 25일, 박근혜는 취임식과 함께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정부 명칭은 별명 없이 그냥 박근혜 정부로 결정되었다.


곧바로 그녀는 조직 개편에 들어갔다. 우선 이명박 정부가 폐지했던 부총리직을 다시 만들었다. 해양수산부를 신설하였고 교육과학기술부를 교육부와 미래창조과학부로 개편하고, 외교통상부를 외교부로 개편하였다. 또한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국토해양부를 국토교통부로 개편하였다. 그밖에 지식경제부를 산업통상자원부로, 농림수산식품부를 농림축산식품부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박근혜는 첫판부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북한과의 관계가 그것이었다. 북한은 첫판부터 남북불가침합의를 폐기하겠다고 발표했다.[60] 북한은 또한 각종 미사일이 핵탄두를 장착한 채 대기상태에 있다고 위협했으며, 1991년 남북 불가침 합의 폐기와 판문점 남북 직통전화 단절을 선언했다.[60] 이에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우리 한국을 공격한다면 인류의 의지,대한민국은 당연하고 인류의 의지로 김정은 정권은 지구상에서 소멸될 겁니다."라고 주장하였다.[60] 국방부 또한 북한군이 대규모 훈련을 위해 집결한 상태라며, 만약에 공격할 경우 대응 규모와는 상관 없이 응징하겠다고 강조했다.[60]


개성공단에 관해서도 문제는 계속되었다. 결국 4월 26일,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개성공단 내의 잔류인원에 대한 철수를 결정하였다.[80] 이에 따라 27일, 개성공단에 체류하고 있던 126명이 철수했고, 29일에 나머지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81] 그러나 남은 잔류인원 50명 중 43명만 귀환 허가를 받았다(물론 나머지 7명도 훗날 귀환하였다).[82]


이러한 북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박근혜는 단호하게 대응하였고, 그 여파로 지지율이 상승했다.[83]


숭례문 복원

2008년 2월 방화 사건으로 소실된 숭례문이 복원되었다. 2013년 5월 4일, 숭례문 복원 기념식이 열렸다.[84] 박근혜는 이 행사에 참석해 "숭례문 복구가 우리 문화의 저력과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라고 연설했으며 "한류가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키고 새로운 지구촌 문화의 흐름으로 자리 잡은 지금, 대한민국이 진정한 문화강국으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우리 문화의 뿌리인 전통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84] 또"기와 한 장, 단청 하나에도 혼신의 노력을 담아 땀 흘려주신 수많은 장인 여러분의 노고와 대를 이어 길러온 소나무를 아낌없이 기증해주시고 7억원이 넘는 성금을 모아 보내주신 국민 여러분의 사랑이 깃들어 있다"며 국민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84]


방미와 한미 정상회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고 있는 박근혜

윤창중 대변인의 인턴 성추행 의혹

 윤창중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13년 5월 7일 밤(미국 기준시) 홍보수석비서관실의 윤창중 대변인이 박근혜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인 미국 방문 중 술을 마시고, 주 미국 한국대사관에서 지원한 인턴 여성의 둔부 근처에 손을 댄 행동과 다음 날 새벽 호텔에서 과도하게 노출된 상태로 해당 여성을 마주했다는 의혹이 발생, 윤창중은 바로 성추행으로 미국 경찰에 신고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이 윗선에 보고되어 경질되었다는 내용이 언론에 유포되었다.[85][86] 이 사건으로 직속 상급자인 이남기 홍보수석비서관(차관급)이 사과발표를 하였으며, 사의를 표명하였다. 이남기의 사직서는 5월 중순 수리되었다.[87][88] 또한, 이남기 홍보수석비서관과 윤창중 전 수석대변인 간의 진술 차이, 대통령에 대한 사과 표현 등이 문제시되어 허태열 대통령비서실장(장관급)이 공식사과를 발표하였다.[89]


이후 윤창중은 홀로 귀국하였고, 박근혜는 국민들에게 이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국가정보원, 국군사이버사령부 여론 조작 사건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여론 조작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국가정보원 개입 의혹과 관련한 사건의 전개

2012년 대선 당시 국가정보원과 국군사이버사령부가 직원들을 동원해 문재인을 비방하는 댓글을 쓰는 등 박근혜에게 유리하도록 여론을 조작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국가정보원 사건'이 불거져 수사를 진행 중이던 2012년 12월 16일, 박근혜는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의 토론 중 당해 사건의 조사 결과가 발표되기 전이었음에도, 해당 사건의 증거가 없는 것으로 나왔다고 발언하였다. 토론회 직후 대선 3일 전인 12월 16일 일요일, 서울지방경찰청은 국정원 여직원이 댓글을 단 흔적이 없다고 사전 발표했다. 그러나 대선 이후인 2013년 6월, 검찰은 경찰의 발표와 달리 국정원 직원들이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댓글을 단 사실이 있다고 상반된 발표를 했다.[90] 더구나 서울지방경찰청이 거짓 발표를 할 당시 국정원 직원들이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댓글을 단 사실이 있는 것을 이미 확인했던 것으로 드러났다.[91]


6월 24일 지속되는 논란에 대해 박근혜는 대변인을 통하여 국정원이 어떤 도움을 주지도,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고 밝혔다. 여야가 제기한 국정원 관련 문제들에 대해 국민 앞에 의혹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92] 그러나 경찰의 허위 수사 발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국정원의 댓글, 트위터등을 통한 대선 개입 활동이 대통령 선거 결과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93] 그러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김용판의 지시에 따른 서울지방경찰청의 허위수사발표는 대통령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 리서치뷰는 전국 득표율과 거의 비슷하게 나온 인천광역시의 시민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다. 경찰이 사실대로 발표했을 경우 박근혜 투표층의 13.8%가 문재인을 찍었을 것이라고 응답했다.[94] 이는 전체 득표율의 7.12%p에 해당된다. 여론조사 업체 리얼미터의 이택수대표는 김용판의 허위수사발표직전 문재인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후보의 지지율을 추월하였지만, 경찰의 발표 이후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고 밝혔다.[95] 리서치뷰가 2013년 10월 27일 전국 만 19세 이상 유권자 10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벌인 결과도, 경찰이 제대로 발표했었다면 대선 결과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박근혜 후보를 찍었던 투표층 중 8.3%는 경찰이 사실대로 발표했을 경우 문재인 후보를 찍었을 것이라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리서치뷰 측은 "이러한 결과를 두 후보의 최종득표율에 반영할 경우 박근혜 후보는 51.55→47.27%, 문재인 후보는 48.02%→52.3%로 나타났다"라고 밝혔다.[96]


2013년 11월부터 박근혜에 대한 퇴진 운동까지 나타나고 있다.[97][98]



2013년 12월 정부세종청사에서 모두발언 중인 박근혜

경찰의 허위 수사발표 사전입수 의혹

박근혜 캠프가 경찰의 허위 수사 발표를 미리 알고 활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새누리당 박근혜 당시 후보의 선대본부장을 맡은 김무성은 마지막 TV토론 당일인 2012년 12월 16일 정오 당사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국정원 여직원 1차 컴퓨터 조사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정보가 있다고 말하였다.[99][100] 한편 박근혜는 그날 저녁 열린 TV토론에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언하였다. 토론회는 오후 10시에 끝났다. 새누리당 박선규 대변인은 9시 40분부터 TV토론을 평가하는 생방송 스튜디오에 들어가 있었고 TV토론이 끝난 이후인 10시 40분,[101] 80분뒤면 내일이 되는 상황에서 '아마 제 생각에는 국가적인 국민적인 관심이 있기 때문에 조사결과가 오늘 나올 겁니다'라고 발언하였기 때문이다. 박선규의 발언대로 오후 11시에 서울지방경찰청이 증거가 발표되지 않았다고 허위발표하였다.


국군사이버사령부의 대선개입 의혹 추가 폭로

 국군사이버사령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13년 10월 14일, 국정감사 중 김광진 의원의 질의를 통해 국군 사이버사령부의 18대 대선 개입 의혹이 불거졌다.[102] 직후 사이버사령부 소속 군무원들이 사용했던 아이디가 공개되었고,[103] 10월 15일에는 국방부가 자체 수사에 착수했다.[104] 이후 실제로 댓글 작업이 있었으며 심지어 평일 업무시간대에도 작업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105] 최초 국방부는 4명의 소수 인원이 벌인 개인적 일탈이라고 해명했으나 당해 해명이 거짓 논란에 휩싸였으며,[106] 뒤이어 추가 용의자들이 공개되는 등 논란은 확대되었다.[107]


2014년 1월 7일, 법원이 국회에 제출한 판결문에는 "옥도경 전 사이버사령관은 연 전 사령관이 보직을 마치고 국방부 정책기획관으로 근무할 당시 '내곡에서 온 정보가 있다. 시간 되실 때 전화로 말씀드리겠다'거나 '국정원 국정조사 관련 깊이 생각해보고 대처 바람' 등의 메시지를 보냈다"라는 내용이 있어 지도부가 깊이 가담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낳고 있다.[108] 2014년 12월 30일,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은 1심 판결에서 '부대원들에 의해 저질러진 범행의 구체적인 내용 전부를 알고 지시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금고 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였고 현재 국방부 검찰단의 항소로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109]


취임 2년차(2014년 2월 ~ 2015년 2월)


2014년 3.1절 기념식에서 연설 중인 박근혜

박근혜의 취임 2년차는 통일대박론,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등을 제시하며 출발하였고, 4월 초까지 대통령 국정지지도 역시 60%를 웃도는 등 여론, 상황 또한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발생한 세월호 사고로 인하여 6개월 가까이를 사고 수습 및 그로 인한 논란, 데모 등에 대응하느라 허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2014년 연말 발생한 이른바 청와대 문건 유출 파동 역시 1개월 가까운 시간을 허비하게 하였고, 국정지지도의 추가적인 하락을 불러왔다.


통일대박론

박근혜는 2014년 1월 6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입니다’고 밝히며 통일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제시했다. 그는 통일을 통하여 남북간의 경제 통합으로 인한 경제적인 효과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후 대통령 직속 자문위원회로 ‘통일준비위원회’가 설치되는 등 계속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계속된 대남 위협, 북핵 문제 등으로 인하여 통일대박론은 강력하게 추진되지는 못하고 있다.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박근혜는 연두 기자회견에서 ‘경제혁신 3개년 계획’에 대해 밝힌 이후 2014년 2월 25일 취임 1주년을 맞아 대국민담화 형식으로 이를 발표하였다.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은 고용, 규제, 산업구조 등에 대한 종합적인 구조개혁 방안이다. 박근혜 정부의 핵심 경제정책으로서 초이노믹스와 더불어 추진되고 있다.


규제개혁

2014년 3월, 첫 번째 대통령 주재 규제개혁 회의가 TV를 통해 생중계되는 가운데 개최되었다. 회의에서 박근혜는 관계 장관에게 직접 규제개혁을 지시하는 등 규제개혁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밝혔다. 이후 9월에 2차 규제개혁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도 규제개혁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규제개혁의 속도는 상당히 느린 편이다.


세월호 사고

세월호 사고의 발생 및 초기 대응

2014년 4월 16일 진도 해상에서 청해진해운 소속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하였다. 이 사고로 인하여 세월호에 침몰하고 있던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과 일반인 등 300여명이 사망하였다. 사고 발생 이후 해양경찰의 미숙한 대처와 미흡한 구조로 인하여 다수의 사망, 실종자가 발생한 것으로 인식되어 해경 및 정부에 대한 강한 비판여론이 발생했다.


박근혜는 사고 발생 3일 후인 4월 19일 실종자 가족들이 모여 있는 진도 체육관을 방문하여서 구조 계획 등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실종자 가족들이 박근혜에 대하여 고성과 욕설을 하였고 긴장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후 해경 및 정부의 구조 및 사고 대응에 있어서 매스컴 및 여론의 엄청난 비판이 발생하였다. 박근혜는 사고 발생 후 10여일이 지난 4월 하순 국무회의 모두발언을 통하여 대국민 사과 메시지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여론의 비난은 계속되었고 일부 진보세력은 대통령 하야를 주장하면서 청와대 홈페이지에 대통령 하야 청원글을 올리기도 하여 논란을 빚었다.


수습 과정

세월호 사고의 파동이 계속되고 있던 5월 초 석가탄신일을 맞아 박근혜는 조계사를 직접 방문하여 석가탄신일 법요식에 참석하였다. 그녀는 석가탄신일 축하메시지에서 세월호 사고에 대하여 거듭 사과하였다.


5월 19일, 박근혜는 TV와 라디오로 전국에 중계된 대국민담화를 통해 세월호 사고에 대하여 다시 사과하였다. 박근혜는 ‘세월호 사고의 모든 책임은 대통령인 저에게 있다’고 밝혔다. 그는 재발 방지 대책으로서 구조 및 사고대처 미흡을 책임을 물어 해양경찰청을 해체하고, 안전정책을 총괄하는 안전행정부 역시 해체에 가깝게 개혁하며, 안전정책 및 구조를 담당하는 국민안전처를 신설하는 등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6월 4일, 세월호 사고 파동 속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여권이 예상을 깨고 선전하였다. 최종 결과는 광역단체장을 새누리당과 새정련이 각각 8 : 9로 분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과는 박근혜의 대국민담화 및 새누리당의 ‘박근혜 대통령을 전면에 내세운 선거유세’, 야당의 광주광역시장 후보에 대한 부적절한 공천 및 그로 인한 후폭풍 등으로 분석되었다.


인사 파동

한편, 세월호 사고 수습 방안의 하나로 청와대와 내각의 인적쇄신이 단행되었는데, 이는 후보자의 잇따른 낙마로 인하여 인사 파동이라는 말까지 발생하게 하였다. 5월 19일 대국민담화 이후 5월 22일 내정한 안대희 국무총리 후보자가 과다 수임료 논란으로 일주일 만에 사퇴하였고, 6월 10일 내정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는 부적절한 교회 강연 발언 논란으로 2주일 만에 사퇴하였다. 박근혜는 결국 6월 28일 정홍원 국무총리를 유임하겠다고 대변인을 통하여 발표하였다. 잇따른 총리 후보자의 낙마는 큰 논란이 되었으며, 매스컴의 많은 문제제기 및 여론의 강한 비판을 불러왔다. 또한, 6월 13일 개각에서 내정한 7명의 장관 내정자 중 2명이 7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제기된 각종 의혹 등으로 인하여 사퇴하였다.


세월호 특별법 논란

세월호 사고에 대한 조사 및 배상을 정하는 소위 ‘세월호 특별법’에 대하여 2014년 6월부터 그해 10월 말까지 강한 논란이 빚어졌다. 이 과정에서 여야간의 극심한 정쟁 및 세월호 사고 유가족의 데모, 단식농성 등이 발생하여서 극심한 사회적 갈등이 발생하였다.


여야는 6월 세월호 사고 관련 국정조사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6월 말 실시하기 시작한 국정조사는 고성과 막말 속에 흐지부지 종료되었으며, 7월 중순부터는 세월호 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주는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야당측과 세월호 사고 유가족의 국회 내 농성, 거리 행진, 데모 등이 벌어졌다. 이러한 도중에 실시된 7월 30일 재보궐선거에서는 새누리당이 승리하였고, 8월 초 새누리당 이완구-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는 세월호 조사위원회 구성 등을 담은 소위 세월호 특별법에 대하여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야당 내부의 반발이 벌어지면서 여야간의 합의는 파기되었다.


한편, 세월호 사고 유가족 김영오가 7월 중순부터 단식농성에 들어가 매스컴의 관심을 받았다. 김영오는 광화문광장에서 40여일 간 단식을 진행하면서 청와대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욕설 등을 퍼붓기도 하였다. 김영오의 단식에는 문재인 민주당 의원, 가수 김장훈 등이 호응하여서 동조하기도 하였다. 또한 김영오의 단식에 대하여 한겨레, 오마이뉴스 등 좌파성향 매스컴이 옹호, 지지를 표하며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


김영오는 8월 말 갑자기 박근혜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청와대 앞에서 시위를 하기도 하였다. 김영오의 뜬금없는 면담 요구에 대하여 박근혜는 별도의 반응을 보이지 않음으로서 거부 의사를 나타냈다. 김영오의 단식이 30여일을 넘어가였을 때 처남 윤모 씨, 장모 등이 김영오에 대한 사실을 폭로하였다. 처남 등은 ‘김영오는 사망한 딸에 대하여 그동안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자신에게 양육을 맏길 경우 딸을 고아원에 보내겠다는 말을 하였으며, 또한 양육비도 매년 약 10만원 정도만 보내는 등 매우 소액을 지급하였다'는 사실을 폭로하며 김영오에 대하여 극도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폭로 이후 김영오의 단식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이후 김영오는 단식을 중단하였고, 동조하여 단식하였던 문재인 역시 단식을 중단하였다.


여야간의 정쟁이 계속되던 9월 중순, 박근혜는 국무회의 모두발언을 통해 수사권과 기소권은 국가의 권한으로서 민간 위원회에 주는 것은 부적절하며, 여야의 2차 합의안을 넘는 유가족의 요구는 수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후 여야간의 협상이 계속되었고, 9월 말 여야는 조사위원회 구성 등에 대하여 합의하였다. 10월 말 소위 세월호 특별법과 정부조직법, 범죄은닉재산 환수법 등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세월호 특별법 파동은 종료되었다.


초이노믹스

2014년 6월 13일 개각으로 내정된 경제부총리 최경환은 7월 중순 취임하였다. 최경환은 취임 직후부터 금융완화, 부동산규제 완화, 가계소득 증대 및 적극적인 재정 투입을 통하여 세월호 사고 영향으로 침체된 경제를 회복시키겠다고 발표하였다. 그의 이러한 적극적인 경제정책에 대하여 언론에서는 초이노믹스라 부르고 있다.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하여 대통령의 이름이 아니라 장관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로서, 최경환이 박근혜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다는 점, 최경환이 추진하는 경제정책이 정부의 핵심 경제정책이라는 점 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최경환의 취임 이후 종합주가지수 역시 크게 상승하였다.


초이노믹스는 7월 30일 보궐선거에서 여당이 승리하게 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8월 1일 최경환은 DTI, LTV 등 부동산규제를 완화하였다. 또한 9월 1일 부동산대책을 관계부처 합동으로 발표하여 적극적인 부동산 경기 활성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상승하였던 주가가 이후 하락하고, 경기 회복세가 미약하여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10월 말 5조원 규모의 추가 경기부양책을 발표하였다.


한미연합사 해체 및 전작권 전환 무기 연기

2014년 10월 말 한민구 국방장관과 척 헤이글 미국 국방부 장관은 2015년 12월 한미연합사령관에서 한국 합참의장으로 전환되도록 되어 있는 전시작전통제권의 전환을 3대 전환 조건이 충족될 때까지 연기하고, 주한미군을 한강 이북에 계속 주둔하게 하며, 용산 미군기지에 한미연합사를 계속 두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한미연합사의 해체 및 전시작전통제권의 전환을 사실상 무기한 연기하였다. 또한, 양국 국방장관은 한미동맹을 전략동맹으로 더욱 발전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전작권 전환의 무기 연기로 인하여 한미동맹, 한미 연합 방위 체계가 보다 굳건해지고, 북한의 위협에 대하여 지휘권의 단일화 등을 통해 효과적으로 한국을 방위할 수 있게 되었고, 북핵 위협에 대한 미국의 확장억제 공약이 더욱 확실하게 보장되었다. 또한 주한미군의 한강 이북 주둔에 대하여 합의함에 따라서 인계철선도 유지되게 되었다.


정윤회 문건 파동

 정윤회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14년 11월 말 세계일보의 보도를 통하여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이 공식 제기되었다. 이 문건은 청와대 행정관이었던 박관천 경정이 만든 것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측근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정윤회 씨가 청와대 비서관들과 만나면서 국정에 개입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세계일보의 보도 이후 정윤회의 국정개입 의혹이 제기되면서 ‘정윤회 문건’이 급속히 정국의 중심으로 부상하였다.


청와대는 이 사건에 대하여 문건 유출이 핵심이라고 규정했고, 문건 유출자로 지목된 박관천 경정 등을 검찰에 수사 의뢰하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수석비서관 회의 모두발언을 통해‘청와대 문건 유출은 국기 문란’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하여 야당에서는 ‘비선 실세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정윤회가 국정에 개입하였는지 여부가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박관천의 상관이었던 전 청와대 비서관 조응천은 문건의 내용 중 60% 이상이 사실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검찰은 이 사건에 대하여 수사에 착수하였고, 정윤회, 대통령 동생 박지만씨, 조응천, 박관천, 청와대 이재만 비서관 등이 검찰에 출석하여 조사를 받았다. 검찰은 박관천을 구속하였고, 조응천은 불구속 기소하였다.


통합진보당 해산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2013년 11월 정부가 청구한 통합진보당에 대한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에 대하여 재판관 8(인용) : 1(기각)의 의견으로 인용하였다. 이에 따라 통합진보당은 선고 즉시 해산되었고, 소속 의원 5명 역시 의원직이 박탈되었다. 헌법재판소는 통진당의 강령, 통진당이 내세우는 ‘진보적 민주주의’ 등이 북한의 주장을 추종하고 있고, 북한의 대남 적화 노선을 추종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더불어 통진당이 내세우는 주장과 달리 그들의 숨은 목적은 ‘적화통일’이며, 통진당이 북한을 추종하는 자주파(주사파)에 의하여 장악되었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등을 볼 때 통진당이 내란 등의 무장투쟁을 통해 대한민국 체제를 위협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통진당을 해산한다고 판시하였다.


한편, 의원직 박탈에 대하여서 헌재는 해산되는 정당의 의원직 상실은 정당해산심판의 자동적 효력이며, 해산되는 정당의 소속 의원의 의원직을 상실시키지 않을 경우 정당해산의 효력이 실질적으로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의원직 상실을 결정하였다고 판시하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해산 결정에 대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 역사적 결정’이라고 평가하였다. 야당과 진보성향 언론은 헌재의 결정을 비판하였다. 외국언론들도 민주주의를 죽인 사건이라며 비판 하였다.


취임 3년차(2015년 2월 ~ 2016년 2월)

2015년 2월 25일 박근혜는 취임 2주년을 맞이했다. 이날 청와대와 신촌로터리 등지에서 박근혜를 비판하는 전단이 살포되기도 했다.[110]


메르스 사태

2015년 5월 20일 이후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환자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생, 급속히 확산되자 정부의 초기 대응이 부실했다는 지적이 쏟아졌다.[111] 박근혜 대통령은 방미 일정을 연기하며 메르스 총력 대응에 나서겠다고 밝혔지만,[112]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2015년 6월 3주 기준(95% 신뢰수준, ±3.5%) 긍정평가 29%, 부정평가 61%로 나타났다.[113]


한편 박근혜 대통령은 휴가 기간에도 청와대에 머무른 것으로 알려졌다.[114]


대북 관계

 2015년 DMZ 지뢰폭발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15년 8월경 DMZ에 목함지뢰를 매설하였고, 해당 지뢰가 8월 4일 폭발하여 2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에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며,[115] 10월 16일 방미 일정을 발표하였다.[116]


취임 4년차(2016년 2월 ~ 2016년 12월 9일)


2016년 10월 29일의 박근혜 퇴진 요구 시위

2016년 2월 25일 박근혜는 취임 3주년을 맞이했다.


탄핵 소추

 이 부분의 본문은 최순실 게이트,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입니다.

2016년 10월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임기중 최대의 위기에 몰렸다.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 인생의 전반을 최순실이 관여한 것으로 의심되며 대통령취임이후 현재까지 모든 정책에 최순실이 관여한것으로 추측되고있다. 수사가 진행중이나 현재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언론이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이로 인해 집권후 최악의 지지율 하락으로 식물대통령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117]


2016년 12월 3일 오전 4시10분,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과 무소속 의원 171명이 헌법과 법률 위반으로 인하여 "대통령(박근혜)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발의했다.[7] 그리고 12월 9일 가결됨에 따라 권한이 정지되었다.


권한 정지 기간 (2016년 12월 9일 ~ 2017년)

 이 부분의 본문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입니다.

2016년 12월 9일 권한이 정지된 후 박근혜는 탄핵이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재임 당시 국정 지지율 추이(작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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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날짜는 조사 실시 기간임.


조사기관 : 리얼미터.


긍정평가(%) 부정평가(%) 출처(url) 비슷한 시기의 주요 이슈

2013 3 4-8 50.4 36.3 [44]

2013 3 18~22 51.9 35.2 [45]

2013 3 25~29 45.3 40.8 [46]

2013 4 8-12 47.2 39.2 [47]

2013 4 22~26 49.9 36.2 [48]

2013 4~5 29~3 53.5 34.7 [49]

2013 5 27~31 55.4 32.7 [50]

2013 6 10~14 63.2 25.5 [51]

2013 6 17-21 63.3 25.5 [52]

2013 7 1-5 59.6 28.4 [53]

2013 7 8-12 60.8 27.2 [54]

2013 7 22-26 62.4 26.1 [55]

2013 7-8 29-2 62.4 27.4 [56]

2013 8 12-16 61.1 28.2 [57]

2013 8 19-23 59.3 31.5 [58]

2013 8 26-30 61.4 29.5 [59]

2013 9 2-6 67.0 24.2 [60]

2013 9 9-13 66.7 23.1 [61]

2013 9 16-20 60.8 31.6 [62]

2013 9 23-27 61.3 32.1 [63]

2013 9-10 30-4 59.0 35.0 [64]

2013 10 7-11 59.8 33.0 [65]

2013 10 14~18 57.9 33.3 [66]

2013 10 21-25 56.9 36.4 [67]

2013 10-11 28-1 56.2 37.2 [68]

2013 11 11-15 56.7 35.5 [69]

2013 11 18-22 56.8 35.5 [70]

2013 12 2-6 53.2 39.2 [71]

2013 12 9-13 54.8 38.1 [72]

2013 12 23-27 48.5 44.5 [73]

2013~2014 12-1 30-3 54.5 41.1 [74]

2014 1 6-10 54.3 39.2 [75]

2014 1 20-24 53.5 38 [76]

2014 2 3-7 56.6 35.0 [77]

2014 2 10-14 56.4 35.0 [78]

2014 2 17-21 55.1 37.2 [79]

2014 3 3-7 57.6 32.8 [80]

2014 3 10-14 59.0 33.0 [81]

2014 3 17-21 61.6 29.8 [82]

2014 3-4 31-1 60.5 31.1 [83]

2014 4 7-11 63.1 30.5 [84]

2014 4 14-18 64.7 27.2 [85] 세월호 침몰

2014 4 21-25 57.9 33.8 [86] 세월호 침몰

2014 4-5 28-2 52.9 39.7 [87] 세월호 침몰, 비공개 사과, 조문 할머니 연출 논란

2014 5 7-9 51.8 41.2 [88] 세월호 유족들의 청와대 항의방문, KBS 수신료 인상안 상정 소식, NLL 논란

2014 5 12-16 51.1 40.7 [89] 세월호 유족들과의 만남, 세월호 참사 관련 대국민담화

2014 5 19-23 51.1 41.5 [90] 세월호참사 관련 대국민담화, 안대희 전 대법관 총리 지명, 남재준 국정원장 및 김장수 안보실장의 사실상 경질 소식

2014 5 26-30 50.9 40.6 [91] 안대희 총리 지명과 사퇴, 국정원장, 안보실장 사실상 경질 소식

2014 6 2~3, 5~6 51.8 41.1 [92]

2014 6 9-13 48.7 44.3 [93] 문창극 총리 후보자 지명

2014 6 16-20 44.0 49.3 [94]

2014 6-7 30-4 46.1 46.6 [95] 시진핑 주석 방한

2014 7 7-11 45.3 48.6 [96] 김명수-정성근 장관 후보자들의 인사청문회,

2014 7 14-18 48.2 46.2 [97] 새누리당 전당대회, 김명수, 정성근 장관 후보자 낙마

2014 7-8 28-1 46.5 48.0 [98] 국회의원 재보궐선거(7.30) 15개 선거구 가운데 11곳 새누리당 당선자 배출

2014 8 11-15 51.4 42.3 [99]

2014 8 18-22 51.8 41.6 [100] 세월호 특별법 여야 재합의안에 대한 세월호 유족들의 거부

2014 9 1-5 52.1 41.4 [101] 새누리당 송광호 의원 체포동의안 부결, 부동산 대책 발표, 규제개혁 회의 주재

2014 9 10-12 50.3 43.8 [102] 세월호 특별법 처리 지연, 담뱃값, 주민세 등 증세 소식

2014 9 22-26 51.8 42.0 [103] 유엔 기조연설, 한·캐나다 FTA 체결

2014 9-10 29-2 51.0 42.5 [104] 검찰의 '사이버 검열'과 '카카오톡 메시지 사찰' 논란

2014 10 13~17 49.8 43.8 [105]

2015 4 13~17 38.2 56.1 [106]

2015 8 3-7 39.5 54.0 [107] ‘8·14 임시공휴일’ , 주 후반 ‘박근령씨 발언’, ‘8·6 대국민 담화,’

2015 8 10-13 39.9 53.8 [108] ‘北 지뢰 폭발’ 사건

2015 8 17-21 41.0 54.2 [109] 남북 ‘상호포격’

2015 8 24-28 49.2 45.4 [110] 8·25 남북합의 타결,

2015 8-9 31-4 50.4 44.0 [111] 중국 전승절 참석

2015 9 7-11 51.7 42.3 [112] ‘제주 돌고래호 사고’, 이산가족 협의 타결, 지역 현장행보

2015 9 14-15 50.3 44.1 [113] ‘친박 후보론’, ‘TK물갈이론’, ‘오픈프라이머리 불가론’, ‘친박 후보론 관련 레임덕 재촉’ 발언

2015 9 21-24 46.6 47.7 [114]

2015 9-10 29-2 48.3 45.0 [115]

2015 10 5-8 46.8 49.1 [116] 전략공천 내홍, TPP,역사교과서 국정화

2015 10 12-16 48.0 47.0 [117] 역사교과서 국정화, 한미 정상회담 효과, 공천 갈등

2015 10 19-23 46.9 48.7 [118]

2015 10 26-30 44.5 50.0 [119] ‘국정교과서 추진 비밀 TF팀’ 운영 논란

2015 11 2-6 46.0 48.3 [120] 한일 정상회담 등 주초의 정상외교, 주후반 규제개혁 장관회의, 통일준비위원회

2015 11 9-13 45.6 49.7 [121] ‘총선심판론’ 발언, 정부·청와대 인사 총선출마설, ‘유승민 부친상 조화 논란’, 개헌론

2015 11 16-20 46.2 48.3 [122] G20 정상회의, APEC 정상회의

2015 11 23-27 47.1 48.7 [123] ‘서거 YS’ 예우 표명, 세월호 특조위의 대통령 조사 방침, 폭력시위·국회 관련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

2015 11-12 30-4 47.8 47.0 [124] ‘기후변화협약 정상회의’, ‘TK지역 SOC 예산 편중 논란’, ‘한중FTA 상생기금 준조세 논란’

2015 12 7-11 46.0 49.5 [125] 총선심판론

2015 12 21-24 42.5 51.7 [126] 5개 부처 개각과 쟁점법안 처리 관련 논란

2015 12 28-31 42.5 53.0 [127] 12·28 일본군 위안부 합의

2016 1 4-8 44.6 51.0 [128] 북한의 4차 핵실험 관련 보도

2016 1 11-15 44.1 52.0 [129] 2·28 위안부 합의, 누리과정 예산갈등

2016 1 18-22 44.1 48.6 [130] ‘쟁점입법 촉구 서명운동 참여’

2016 1 25-29 44.8 49.6 [131] 쟁점입법 서명운동, 누리과정 예비비 배정, 김무성 대표의 ‘정치인,’ ‘완장’ 발언

2016 2 1-5 42.9 50.5 [132] 최경환 의원의 ‘TK물갈이 진박(眞朴) 개소식 정치’, ‘김종인 생일축하 난(蘭) 수령 거부’ 논란

2016 2 15-19 45.9 49.0 [133] 대북 강경대응 국회 안보연설, ‘北 개성공단 자금전용’ 논란, 中 ‘한미 사드 배치’ 강력 반발

2016 2 22-26 46.1 48.2 [134] 北 ‘1차 타격은 청와대’ 발표, UN 안보리 대북제재안 관련 보도

2016 2-3 29-2 46.2 48.1 [135] UN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안 통과, ‘안보·반(反)개혁 야당심판’ 3·1절 기념사, 국가조찬기도회·장교합동임관식 대북 강경 발언, ‘친박 실세 유승민계 공천배제 발언’ 논란

2016 3 7-11 46.4 47.4 [136] 한미 연합훈련, 北 사이버테러 관련 보도, 해외 북한식당 출입 제한, ‘윤상현 의원 막말 녹취록’ 파문

2016 3 14-18 41.9 52.5 [137] ‘비박계 공천 학살’ 논란 증폭

2016 3 21-25 40.1 52.2 [138] 친박계의 ‘유승민 고사작전’ 논란, 유 의원의 새누리당 탈당 후 무소속 출마 선언, 김무성 대표의 ‘옥새 투쟁’

2016 3-4 28-1 39.1 55.5 [139] 총선 선거 운동 본격화, 박대통령 사진 논란

2016 4 4-8 39.6 54.5 [140] 야당의 ‘정부심판’ 선거운동, 핵안보정상회의 참석, 멕시코 방문 등

2016 4 14-15 31.5 62.3 [141]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야권 압승

2016 4 18-22 31.4 63.5 [142] 여당의 총선 패배 여파, ‘어버이연합’ 관제집회 청와대 연루 의혹, 前 청와대 비서관 ‘낙하산 인사’ 논란

2016 4 25-29 31.0 64.4 [143] 총선 패배에 대한 대통령 책임론, 기존 국정운영 방식 고수, 이란 방문

2016 5 2-6 35.9 59.9 [144] 이란 경제 외교, 北 노동당 대회 관련 보도

2016 5 9-13 34.5 61.1 [145] ‘이란 경제 성과’ 논란, ‘가습기 살균제 사건 정부책임론’, ‘北 리영길 처형설 오보 청와대·국정원 책임론’, ‘어버이연합 관제집회 의혹’ 수사 지연, 임을 위한 행진곡 관련 논란

2016 5 16-20 32.3 62.9 [146]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불가 소식, 새누리 전국위 파행 소식

2016 5 23-27 33.9 61.3 [147] 아프리카·프랑스 방문, 여당의 당 정상화 관련 보도, ‘상시 청문회법 거부권 행사’, ‘반기문 대선출마 시사’

2016 5-6 30-3 36.2 59.8 [148] 아프리카·프랑스 방문 관련 보도

2016 6 7-10 37.0 58.3 [149] 아프리카·프랑스 방문, ‘순방 과로’ 관련 보도, 홍기택 전 산업은행장의 ‘청와대·정부, 대우조선 지원 일방 결정’ 인터뷰

2016 6 13-17 37.4 58.0 [150] 20대 국회 개원 연설, 여당의 ‘탈당 무소속 의원 일괄 복당 결정’

2016 6 20-24 35.3 59.0 [151] ‘영남권 신공항’, 北 ‘무수단 미사일 발사’

2016 6-7 27-1 35.2 58.7 [152] 야당의 ‘총선 홍보비 리베이트 의혹’과 ‘의원 가족채용 논란’, ‘이정현 전 홍보수석 녹취록’ 논란

2016 7 4-6 33.1 59.2 [153] ‘靑 서별관 회의, 분식회계 인지 대우조선 4조2천억 지원’ 논란과 ‘이정현 전 홍보수석 녹취록’

2016 7 11-13 34.7 58.2 [154] ‘사드 배치 논란’

2016 7 18-20 35.8 58.5 [155] ‘우병우 민정수석 의혹 사건’, ‘친박실세 공천개입 녹취록’ 논, ‘황교안 총리 감금, 국정 콘트롤타워 마비 논란’, ‘외부세력 개입 논란’, ‘북, 탄도미사일 발사 및 기습도발 가능성’, ‘합참 긴급 작전지휘관회의’

2016 7 25-29 31.6 60.7 [156] ‘우병우 민정수석 의혹’, ‘사드 배치 논란’, ‘친박실세 공천개입 녹취록’ 파문, ‘휴가중 울산 민생행보’

2016 8 1-5 34.6 57.6 [157] ‘대통령 가족사 국무회의 발언’, ‘與 8·9전대'

2016 8 8-10 34.9 57.3 [158]

2016 8 16-19 34.6 58.8 [159] ‘전기요금 누진제,’ ‘3개 부처 개각’, ‘우 수석 논란,’ ‘사드 제3후보지’, ‘駐英 북한 고위외교관 한국 망명’

2016 8 22-24 35.1 56.5 [160] ‘주영(駐英) 북한 고위외교관 한국 망명,’ 대통령의 ‘北 붕괴·테러 가능성’ 언급, 북한의 ‘핵 선제 타격 가능성’ 성명, ‘北 주민 서해 탈북’, ‘禹 수석 논란

2016 8-9 29-2 31.0 60.8 [161] ‘우 수석 거취 논란’, ‘이석수 특별감찰관 사의 표명’,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파행’ 등

2016 9 5-9 31.0 60.5 [162] ‘한진해운 물류대란’, ‘위안부 소녀상 철거 논란’, ‘조윤선·김재수 장관 임명 강행’, 북한의 5차 핵실험

2016 9 19-21 32.5 61.4 [163] ‘9/12·19 경주 지진’, ‘비선·청와대 실세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 개입 의혹’, ‘北 5차 핵실험’

2016 9 26-28 34.3 59.7 [164] ‘김재수 농림부 장관 해임안 처리’에 대한 여당의 강력 반발 관련 언론보도

2016 10 4-7 33.7 59.3 [165] ‘탈북 권유’ 국군의날 기념사, 김진태 의원 ‘간첩 발언’, ‘미르·K스포츠 재단 설립 의혹’ 관련 증인채택 논란, 울산과 부산의 태풍 피해

2016 10 10-14 31.4 62.0 [166] ‘최순실 딸 특혜 의혹,’ ‘檢, 선거법 위반 혐의 기소’ 정치보복 논란

2016 10 17~21 28.5 64.5 [167] 최순실씨 관련 의혹 확산, 그에 대한 박 대통령의 檢수사 통한 진상규명 의지를 밝힘.

2016 10 24~28 19.0 74.8 [168] ‘최순실 국정농단’

2016 10~11 31~2 10.9 84.2 [169] ‘최순실씨 검찰 소환,’ 안종범 전 수석 ‘朴대통령·최순실 직거래’ 발언 보도, ‘김병준 총리 전격 지명’ 야3당 강력 반발

2016 11 7~9 11.1 83.7 [170] ‘朴대통령 직접 개입 의혹 확산,’ ‘우병우 황제수사 논란’, ‘대규모 촛불집회 예정 보도 확산,’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 강행’ 보도

2016 11 14-18 9.7 86.1 [171] 촛불집회, ‘靑, 하야 불가 입장, 최순실 기소 전 검찰조사 불가입장’, ‘엘시티 수사 지시’

2016 11 21-23 10.1 86.3 [172] 검찰수사에 대한 청와대의 강력 반발

2016 11 21-25 9.7 86.4 [173] 검찰수사

2016 11 28-30 9.8 86.0 [174] 3차 대국민 담화, 5차 촛불집회

2016 11-12 28-2 10.5 85.1 [175] ‘3차 대국민 담화’, 새누리당의 ‘4월 퇴진·6월 대선’ 당론 채택

2016 12 5-9 10.9 85.3 [176] 탄핵, 대통령 퇴진 입장, 촛불집회, 국조특위 청문회

평가

원칙과 신뢰의 이미지

박근혜는 원칙, 신뢰, 약속을 지킨다는 이미지가 장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녀는 세종시 문제,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등을 통해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거나 원칙을 중시한다는 이미지를 얻었다. 2012년 대선에 출마한 후보로서, 이러한 이미지는 국정운영에서의 안정감에 대한 기대로 연결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한 이미지는 지지층에서만 통할 뿐이며,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에겐 소통도 안 되고 감동도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고 평가되기도 했다.[118][119][120][121][122]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일부 대선 공약을 수정하여서 반대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123]


비판

소통 부재와 비밀주의

박근혜는 일반 국민들은 물론이고 당내 인사들과도 소통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118][119][124] 새누리당 인사들은, 발신번호 표시제한 전화로 연락이 온다, 솔직하게 터놓고 소통하지 않는다, 만나거나 접근하기 어렵다는 경험 등을 예로 들며 박근혜가 소통 능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122] 2004년 제17대 국회에서 당시 한나라당 대표를 맡고 있던 박근혜와 함께 원내대표로 활동하였던 김덕룡은 박근혜가 소통이 안 되는 것을 넘어 "먹통"이라고 평가하면서, 당시 박근혜에게 정수장학회 문제를 털고 넘어가야 한다고 조언을 했지만 자신의 조언을 거부한 것은 물론 이후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일화를 예로 들었다. 또한 박근혜에게 친구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으며, 그녀의 참모들조차 그녀가 주요 현안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누구와 상의하는지 모른다고 주장하였다.[125]


독단주의

박근혜는 자신이 가진 독단적인 이미지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12년 7월 11일 김문수 새누리당 대선 경선후보의 예방에 "박근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칠푼이다"라고 말했다.[126] 칠푼이는 지능이 조금 모자라는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인데, 과거 이명박 대통령이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독재, 독단적인 면에 대해서도 칠푼이라 표현한 적이 있어 박근혜 의원과 친박계의 독선적인 당 운영에 대한 비판적 표현[127] 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차남 김현철이 총선 때 새누리당의 공천을 못 받은 것에 대한 감정적 발언'[128] 으로 보기도 한다.


2011년 9월 정치권을 강타한 '안철수 열풍'과 관련해 기자들이 박근혜에게 '안철수의 지지율이 자신을 넘어섰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반복된 질문에 대해 "병 걸리셨어요?"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민주당은 사과를 요구했고 이후 박근혜는 "지나가는 식으로 농담을 했는데, 표현이 부적절 했던 것 같다"라며 유감을 표명했다.[129] 박근혜는 2004년 MBC 라디오 프로그램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도 진행자가 경제 살리기에 대하여 질문하자 '지금 저하고 싸움하시는 거예요?'라고 언급한 것을 비롯해 올해 1월 복지 문제와 관련된 기자들의 질문에 '한국말 모르세요?'라고 대답한 것 등이다.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조국 교수는 "박근혜 전 대표는 불편한 질문과 비판을 참지 못한다. 영애 박근혜님이 '평민'들과 겸허히 소통하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 새로운 별호를 지어 올리고자 한다. '발끈해'"고 말했다.[130]


권위주의

한나라당 친이명박계는 "박근혜는 권위주의적 리더십과 폐쇄적 조직 문화가 팽배해 있다"며 "두 차례 대선에서 실패한 이회창 전 총재의 전철을 되풀이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 친박계 의원은 "국민들은 박 전 대표를 더 이상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있는 정치인이 아니라 독립적인 지도자로 바라보고 있다"며 "박 전 대표를 흠집내기 위한 어떤 시도도 성공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하였다.[131] 또한 친이계는 "지역주의에 기댄 정치인"이라며 비판하였다.[132] 한나라당 강명순 의원은 "자신은 유신 시절 빈민 운동을 하느라 고생했는데 박근혜는 청와대에서 잘 먹고 잘 지낸 만큼 빚을 갚아야 한다"며 비판했다.[133]


한마디 정치

2008년 대선 이후 박근혜는 미국소 수입 협상에 대한 반발이 일던 가운데 이명박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거나, 미디어법 상정시 "반대표를 던질것"이라고 말하거나, 이명박이 내놓은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반대 입장을 밝히거나,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당시 이명박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차기 정권에서 계속 추진 할 것을 약속하는 등 중요한 사안에서 짧은 말을 던지는 일명 '한마디 정치'를 해왔다. 2010년까지 차기 대선후보 지지율 1위를 지켜온 박근혜의 이런 의견들은 당정에 큰 영향력을 끼쳤으며 친이계는 정부에 협조하지도, 그렇다고 반대하지도 않는 박근혜의 모호한 행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동안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는 박근혜를 당대표나, 국무총리로 추대하는 방안을 고려해왔지만 박근혜는 이를 모두 거부하였으며 친박계 의원이 당대표를 맡는 것조차 반대하는 등 소극적인 행보를 보여왔다. 하지만 지지율 1위를 지키기 위해 너무 몸사리기만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명박과 화해를 하거나, 아예 다른 노선을 선택하여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134] 이러한 비판들 속에서 이명박 정권 취임 초기에 실시했던 자기 대선 후보들 지지율 조사에서 50%에 육박하던 박근혜의 지지율은 2010년 이후로 30%까지 하락했다.[135]


정책적 평가

대통령 당선 후 경제 정책으로는 복지, 경제민주화, 창조경제를 기본 이념으로 하고 있으며, 장기침체된 경제에 대한 해법으로는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금융완화적 경기부양방안인 초이노믹스를 내세우고 있다.[136] 대북정책으로는 원칙에 입각한 대응을 중시하며,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핵심 대북정책으로 하고 있으며, 북한의 비핵화를 기반으로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이룬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137]


박근혜 정부의 외교정책은 임기 초반에는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138] 임기 중반으로 가면서도 일본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아 한미일과의 군사적 동맹에서 한국이 소외된다는 비판과 함께 외교정책이 중국에 치우쳐 있다는 비판도 받아 왔다.[139][140] 여기에 중국 또한 일본과의 관계회복을 도모하는 쪽으로 외교정책을 선회하여, 박근혜 정부 들어 동북아에서 한국만이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있다는 우려도 있다.[141][142] 박근혜 정부의 대일 외교정책은 과거사 문제 해결 없이는 한일관계를 개선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왔으나, 일본의 아베 정권과 미국의 오바마 정부가 철저한 전략적 외교로 실속을 챙기는 가운데 한국만이 외교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다.[143][144][145]


주요 대선 공약이었던 '증세 없는 복지' 공약과 사회통합 약속인 '100% 대한민국' 공약은 당선 후 노선이 수정되었거나 잘 지켜지지 못했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국민대통합' 공약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 대한 비판이 있다.[146][147][148]


임기 초반부터 가장 비판을 받아온 것은 인사 실패 문제로, 박 대통령이 처음으로 중용한 인사인 윤창중 전 대변인, '의혹 백화점'으로 불리며 국방부 장관 후보에서 낙마한 김병관, 과거사 관련 교회 강연 논란으로 비판받으며 국무총리 후보에서 낙마한 문창극 등 폐쇄적이고 불투명한 과정을 거친 '수첩인사'의 실패는 비판을 받는다.[149][150][151]


임기 중반에 들어서며 경제정책 면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데, 디플레이션 우려가 고조되는 가운데 경기활성화에 실패했고, 가계의 대출 요건 완화를 기조로 하는 초이노믹스의 여파로 가계부채가 급증, 사상 최대를 갱신하는 등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경기부양과 가계부채의 딜레마 속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152] 기업들의 수출 실적이 급감하고, 미국, 일본, 중국의 주식 시장이 호황을 누린 것과 대조적으로 박근혜 대통령 임기 동안 한국의 주식시장이 침체되어 온 것도 박근혜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한 많은 우려를 낳고 있다.[153]


박근혜 정부는 임기 중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고와 메르스 확산에 미숙하게 대처하여, 위기 대처 능력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두 사건 모두 초기 대응에 실패하여 사고의 여파를 키웠고, 정보 공개에 소극적으로 대처하여 국민들의 불안감과 정부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는 평이다.[154] 특히 메르스 사태 때는 박근혜 대통령의 위기관리 능력과 리더십에 많은 의구심을 낳아, 집권 3년차 들어 지지율이 20%대로 하락하기도 했다.[155][156]


이명박과 정책적인 유사성 논란과 차별화

이명박 정부 시절 박근혜는 이명박과 거리를 두었으나 완전히 돌아서지는 않았다. 대통령과 면담을 하면서 대통합의 의지를 담고 활동하였다. 과거 정책상 본질적으로는 이명박과 크게 다를바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근거로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박근혜가 내세웠던 '줄푸세'나 당시 경쟁 후보였던 이명박이 내세웠던 '747' 둘다 공통적으로 감세 기조를 내세운 정책이라는 점이다. 또한 박근혜가 2008년 12월 국회의 감세 법안, 2009년 3월 금산분리완화법안, 2009년 12월 예산안 ─ 4대강 예산이 포함되었고 이른바 날치기 통과로 논란이 되었음 ─ 에 찬성해 이명박 정부 정책에 협조한 것도 있다.[157] 이를 빗대어 정치권과 인터넷 상에서 '이명박근혜'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명박과 다르다고 볼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주도했던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되게 만든 것이다. 또한 서울시의 무상 급식 정책 논란 때 바쁜 일정 속에 부재자 투표까지 참여해 오세훈 전 서울시장을 지원했던 이명박과는 달리 관련 사안에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2011년 말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후 당명, 당 상징색, 강령 등을 변경하면서 MB정권과 기존 한나라당과의 차별화를 시도했다. 2012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불거진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사건 악재 속에서도 "어느 정권에서나 민간인 사찰은 일어나며 나도 피해자"라며 논란을 피하기도 했다.[158]


핵심 쟁점 회피

2010년 12월, 새해 예산안이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으로 통과되어 여야간의 갈등이 극화된 상황에서 박근혜가 복지 정책을 강조하며 나타나자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는 "박 전 대표는 날치기로 그 많은 복지 예산이 완전히 삭감될 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유리할때만 고개를 든다"며 박근혜의 행보에 비판을 제기했다.[159] 조선일보도 사설에서 "박 전 대표는 왜 내키는 주제에 대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국민이 박 전 대표에 대해 궁금한 일을 물을 기회는 만들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거북한 주제를 피하려 한다는 느낌을 준다."고 지적했다.[160] 박근혜의 이러한 미지근한 행보에도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데 대한 비판도 있다.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조국 교수는 "박근혜 이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도 지지하는 사람은 삼십몇 %나 된다"라며 "내용도 모르고 좋아하는 것은 감성의 정치일 것"이라고 비판하였다.[161] 그러나 박근혜의 지지자들은 박근혜의 말에 신뢰를 보낸다. "박근혜의 신중함은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불안감에 젖어있는 국민에게 위로와 신뢰를 준다"는 평가가 있다.[162]


최저 임금 논란

박근혜는 2012년 8월 7일 뉴미디어 토론회에서 최저 시급을 묻는 사회자에게 "5000원 좀 넘는 것 아니냐"고 답했다. 4580원이라는 사회자의 정답 발표에 박근혜는 "아르바이트 시급이 5000원이 안 되느냐"고 대답했다. 참고로 박근혜는 지난 18대 대한민국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이었다. 이에 야권에서는 박근혜는 "평생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사람" "서민과 노동자의 생활에 관심이 없는 사람" 이라고 주장하며 여태까지의 서민 코스프레가 위선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강력히 비난하였다.[163]


기타

2005년 열린우리당의 4대 개혁 법안에 반대했다.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나, 고무·찬양과 같은 독소 조항을 빼자고 주장했다.[164]

2002년 박근혜는 한나라당을 탈당해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을 만나기도 했다. 한나라당 내에서 김정일을 만났던 정치인은 박근혜가 유일하다. 이는 박근혜가 남북 관계에 대해 새누리당 주류의 인식과는 다른 '나름의 관점'을 갖고 있음은 분명하다는 주장이 있다.[164]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정국'때에는 "근본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다.

미디어법에 대해서는 "직권상정하면 미디어법 반대표 던질 것"이라며 "여야합의처리를 할것을 요구한다"라며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165] 또한 미디어법 중재안을 제시하였다.[166] 하지만 이후 한나라당이 박근혜의 지적을 받아들였다며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직권상정에 찬성하였다.[167]

세종시 법안에 대해서는 원안대로 또는 원안 플러스 알파로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168]

2007년 8월에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며 "27년 전 광주시민이 겪은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며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만들어 광주의 희생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169]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5·16 군사 정변은 구국의 혁명이었다고 평가하였다.[170]

박근혜는 뉴라이트 세력과 가까운 모습을 몇 차례 보여주며 역사 인식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면을 드러냈다. "뉴라이트 전국연합과 한나라당의 길은 다르지 않다"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원칙으로 하고 선진화를 위해 '공동체 자유주의'를 핵심 이념으로 한다는 것도 같다"고 하기도 했다.[171] 또한 뉴라이트 교과서를 극찬하며, 뉴라이트의 교과서 포럼 등의 교과서 수정 움직임을 지지한 적도 있다.[172]

"일부에서는 자신을 보수라고 이야기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노선은 중도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173] 박근혜가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평가는 과장되었다는 시각이 있다. '친박계'와 달리 '친이계'는 과거 운동권 출신 인사가 포진해있고, 4대 개혁 입법 대해 비타협적 태도를 취한 사실과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이명박 후보가 실용주의를 내세웠기 때문이라는 이유다.[164]

역사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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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재단 방문 시도 관련 논란

2012년 8월 28일 박근혜는 전태일재단을 방문하려고 했지만 유족과 노동자들의 거부와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를 두고 박근혜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과 비판의 목소리들이 잇따랐다.


전태일의 여동생이자 민주통합당 국회의원인 전순옥은 진정으로 전태일 정신을 생각한다면 쌍용차나 용산참사 희생자 등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먼저 찾았어야 한다고 말하고, 이른바 국민대통합에 대해서도, 정책적으로 접근을 하거나 현안이 일어나는 현장을 먼저 찾아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이야기하며 희망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전 의원은 현재의 진실은 미래에 대한 지향과 과거의 삶이 일치할 때 빛을 발하는 것이라며 5·16 쿠데타와 유신, 군사 독재에서 지금의 정수장학회까지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다면 지금의 말과 행동은 그 진실을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하였다.[52]


전태일의 남동생 전태삼도 박근혜는 22명의 쌍용차 사망 노동자들의 분향소부터 방문하였어야 한다면서 새누리당사 앞에서 20일 넘게 대책을 요구하는 쌍용차 해고 노조원들의 요구엔 묵묵부답이면서 전태일 재단을 방문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174]


진중권 교수 역시 박근혜의 방문 시도에 대하여 진정으로 소통과 화해를 하겠다면 지금 눈앞에서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들을 찾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고통은 외면한 채 전태일재단을 방문하려는 것은 쌍용차는 '현재'에 수행해야 할 책임을 의미하는 반면, 전태일 재단은 '과거'로 면피할 소재라 보기 때문이라면서, 이는 노동자의 고통까지 정치수단화 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비윤리적이라고 비판했다.[175]


민주당 쌍용자동차대책 특별위원회 역시, 새누리당사 앞에서 박근혜 후보가 나설 것을 요구하며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는 해고 노동자들을 먼저 만날 것을 촉구했다. 같은 당 은수미 의원도, 최저임금이 얼마인지도 모르는 박근혜 후보의 방문에 우려를 금할 수 없다면서, 정리해고와 용역폭력 등에 고통 받는 수많은 지금의 전태일이 겪고 있는 문제에 답하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고 말했다.[176]


한편, 새누리당의 이상일 대변인은 방문이 무산된 데 대해, "박 후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아무리 방해를 하고 장막을 친다 해도 국민을 통합하겠다는 박 후보의 행보를 막지 못할 것"이라며 "국민을 분열시켜 계층간, 세대간, 지역간 갈등을 조장하는 세력을 반드시 물리치고 국민대통합의 '100% 대한민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말했다.[174]


국가관 발언에 대한 비판

박근혜는 2012년 6월 1일 비례대표 부정 경선과 '종북' 논란에 휩싸인 통합진보당 이석기·김재연 의원에 대해 "국가관을 의심받고 또 국민도 불안하게 느끼는 이런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이어 제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사퇴가 안되면 그렇게 가야된다고 본다"고 답했다.[177]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일부 진보 성향 언론 등은 비판하였다. 경향신문은 사설을 통해 두 사람의 종북 여부는 사법부가 판단할 문제이고 경선부정도 내부조사와 징계절차를 지켜보는 것이 순서이며 국가관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종북'으로 몰아 의원직 제명을 하는 것은 비이성적인 행태라고 비판했다.[178]


한겨레 신문 역시 국가관을 이유로 의원직을 박탈해야 한다는 것은 매카시즘 시대에나 나올 법한 마녀사냥식 발언이라 주장하고, 박 의원 발언은 무엇보다 그의 민주주의적 소양을 의심케 한다고 지적했다. 민주주의는 생각이 다르다고 기본권을 제약할 수 없으며, 생각이 무엇인지를 따져서 국회의원 자격이 있네 없네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설은 종북으로 제명을 논하면 마녀사냥이라는 같은 당 하태경의 발언을 인용하고, 박근혜의 민주주의적 소양이 당의 평균적 인식에도 미치지 못한다면 걱정스러운 일이라고 비판했다.[179]


프레시안도 칼럼을 통해 박근혜가 "민주주의도 법치주의도 무시"한다고 비판했다. 국가관 운운하면서 국민의 기본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와 국민주권을 헌법전 속에 유폐시킨 박정희의 그림자를 박근혜에게서 발견하는 건 서글프고 두려운 일이라면서, 국가관을 의심하고 이를 국회의원직 제명의 근거로 삼는 것은 파시스트적 폭력이라고 비판했다.[180]


법학교수 출신인 새누리당의 이상돈 전 비상대책위원장도 박근혜의 발언이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6월 6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의 발언은 국회법상의 해석에 맞지 않다며 "정확한 법적 해석을 할 것 같으면 잘못된 발언"이라고 말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김재연 의원에 대해 국회법 138조에 따른 의원자격심사를 통해 제명하는 것은 법리상 적법하지 않은 절차라는 것이다.[181]


연합뉴스 사장 출신의 언론인 김종철은 미디어오늘 칼럼을 통해 박근혜의 매카시즘 성향을 비판했다. 박근혜의 국가관 발언에 대해 김종철은 칼럼에서 "그들이 어떤 ‘종북행위’를 했는지에 관한 명확한 증거도 없이 ‘주사파’라고 보면서 국회에서 제명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매카시즘"이라고 주장했다.[182]


5·16 군사 정변 발언

박근혜는 2012년 7월 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5·16 군사 정변에 대하여 "돌아가신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는 발언을 하였다.[183] 이후 일부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49.9%가 박근혜의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오는 등 많은 논란을 낳았다.[184] 논란이 심해지자 8월 7일 한 토론회에서 '5·16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고,[185] 역시 이를 두고 정치권의 다양한 해석이 분분하였다.[186] 5·16 군사 정변에 대한 박근혜의 발언에 대하여 5·16을 두고 박근혜를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해석[187] 도 있지만, 대체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쿠데타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은 부적절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출처 필요]


인혁당 사건에 관한 입장에 대한 논란

박근혜는 2012년 9월 10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인민혁명당 사건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면서 그 부분에 대해서도 또 앞으로의 역사적 판단에 맡겨야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188]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언론과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로부터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박 후보의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는 발언은 헌정절차가 정지된 유신 때 이뤄진 유죄 판결과 민주화 이후 사법부가 무죄로 교정한 판결의 효력을 동일시한 것이며, 이미 역사적, 사법적 판단이 내려진 사안까지 수용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189][190][191]


경향신문과 한겨레, 한국일보 등의 언론들은 사설을 통하여 재심으로 유신 당시의 대법원 판결은 취소되었으며 "지금 이 순간 인혁당 사건이 무죄라는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법적인 사실"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192][193] 특히, 한국일보는 사설에서, "사실상의 헌법중단 상태인 유신 치하의 원판결과 민주화 이후의 재심 판결에 똑같이 '정치 상황'이란 잣대를 들이댄 결과라면 실로 심각하다"면서 그럴 경우 "대한민국의 사법절차, 나아가 헌정질서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라고 비판했다.[194]


광주광역시의 시민단체와 법조계는 박근혜 후보의 발언이 사법부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195] 또한 전국 11개 로스쿨의 인권법학회 학생들도 성명을 통해 박근혜의 발언은 역사인식의 심각한 결여와 법체계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비판했다.[196][197]


야당들도 박근혜 후보의 발언을 일제히 비판하였다. 민주당 정성호 대변인은 2007년 재심을 통해 무죄와 국가배상이 선고되고 사법부가 사죄까지 한 점을 지적하며, 박근혜 후보의 발언은 사법부와 유족을 모독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사과를 요구했으며, 같은 당의 이해찬 대표 역시, 판결은 하나라는 점을 지적하고, 박 후보의 발언이 대법원에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했다. 그밖에 유인태, 박지원, 박영선 의원 등도 "사법부를 무시한 황제적 발언", "일본 극우파들보다 더한 것", "헌정질서를 무시하는 초사법적인 발언"이라고 비판했다.[198][199][200] 진보신당 역시 박근혜 후보의 태도에 대해 자신에게 불리한 문제는 에둘러 말하며 기존 입장을 고수하는 보수 정치인들의 구태라고 비판했다.[190]


이러한 비판이 제기되자, 박근혜 후보는 다음 날 대법원 판결은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당시 조직에 몸담았던 사람들의 증언까지 감안해서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201][202]


하지만 이러한 발언에 대해서는 "사실관계마저 호도"한다거나 "현대사에 대한 무지를 드러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박근혜 후보가 말하는 증언들이란, 박범진과 안병직 등의 증언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의 증언은 1964년의 1차 인혁당 사건에 대한 증언들로, 손석희 교수가 방송에서 질문한 유신 시절의 이른바 2차 인혁당 사건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202][203][204][205]


2012년 9월 12일 인혁당 사건 유족들은 새누리당 앞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이미 박 후보는 2005년에 국정원이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할때도 '한 마디로 가치가 없는 것이며, 모함'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며 "사람이 억울하게 8명이나 사형당한 사건을 가치가 없고 모함이라고 말하는 박 후보는 최소한 인간에 대한 예의조차 있는가. 입이 있으면 대답을 해라"고 비난했다.[206]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안병욱 교수는, 박 후보는 사실관계 가운데 법원의 재심 판결이나 과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처럼 공신력 있는 부분은 무시하고, 공신력이 없어 신뢰가 가지 않는 이야기에 무게를 싣는다면서, 이는 상대를 설득해서 믿도록 해주는 방식은 아니라고 말했다.[207]


당시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았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던 한승헌 변호사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두 개의 판결'이라는 말은 당시 사건의 날조과정이나 재판의 허구성에 대해서 정확히 모르고 하는 말 같습니다. 재심 무죄 판결 이상의 역사적 판단이 있을 수 없다고 봐요. 막연한 도피처처럼 역사의 판단이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되는 겁니다."[208]


한편, 보수언론인 조선일보 역시 사설을 통해, 박정희 시대에 대해서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엇갈리지만, 2차 인혁당 사건의 경우 어떤 논리로도 합리화될 수 없는 어둠의 역사에 속한다는 것이 일반 국민의 공감대라면서, 반면 박 후보의 유신관은 박정희식 유신관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대통령 후보의 유신에 대한 입장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개인사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비판했다.[209]


박근혜 후보의 인혁당 사건에 대한 발언에 대해 각계 각층으로부터 비판이 잇따르자, 2012년 9월 24일, 박근혜 후보는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의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였다.[210] 이에 대하여 인혁당을 "민혁당"이라고 잘못 말한 것, 사과 후 기자들의 질문을 일절 받지 않은 것 등을 지적하며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반응들이 있었다.[211][212][213][214][215] 유족들은 진정성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216] 민주당 정성호 대변인은 평가한다고 하면서도,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후속 조치를 요구하였으며, 안철수 후보 등은 필요한 일이었다고 평가하였다.[217]


비리 전력자와 '철새 정치인' 영입에 대한 논란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이른바 국민 대통합을 명분으로 다양한 인사들을 영입하였다. 하지만 이들 영입 인사들의 전력에 관해, 그들이 비리 전력자이거나 철새 정치인이라는 논란이 제기되었다.


박근혜 캠프의 국민대통합위원장인 김종인은 1993년 동화은행에서 2억여 원을 뇌물로 받아서 의원직을 상실하고 2년 징역을 산 일이 있다는 점이 논란이 되었다.[218] 한광옥은 나라종금으로부터 퇴출 무마 청탁과 함께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2005년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러한 비리인사 영입은 당 안팎으로부터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전여옥은 2011년 영입 당시 김종인의 비리 전력을 지적하며 비판했고, 안대희는 2012년 10월 8일 한광옥이 국민대통합위원장에 임명될 경우 자신이 맡고 있는 정치쇄신위원장직을 사퇴하겠다는 기자 회견을 했다.[219][220] 중앙일보의 김진 논설위원은 칼럼을 통하여 재벌과 은행의 투명경영을 유도해야 할 청와대 경제수석의 자리에 있으면서 오히려 그들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은 중대한 일이라면서, 그런 김종인을 공동선대위원장에 임명한 것은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이게 박근혜의 원칙인가"라고 물었다.[221]


박근혜 후보의 벤처특보로 영입된 장흥순은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의 적자를 감추기 위해 700억 원대의 분식회계를 했다가 구속, 기소되어 2005년 유죄 판결을 받았던 전력이 있어서 당 안팎에서 논란이 일었다.[222]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으로 영입된 김규옥 광주시민단체총연합회 대표는 2001년 1월부터 2006년 말까지 총 149차례에 걸쳐 노인무료급식 보조금 1억 7000여만 원을 자신의 생활비 등으로 사용해 업무상 횡령으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223]


한편 과거 동교동계와 상도동계에 속했던 일부 인사들이 2012년 10월 15일 새누리당사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자신들은 과거 유신 체제에 맞섰으나 국민대통합을 위해 박근혜 후보 지지를 결심했다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과거 전력을 보면, 사실은 당적을 매우 빈번하게 옮겼던 이른바 철새 정치인이거나 과거에 이미 한나라당에서 활동하였던 인사들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224][225]


이날 회견에 참여한 안동선 전 의원은 2002년 새천년민주당을 탈당, 자유민주연합으로 당적을 옮겼다가 2004년 1월 새천년민주당으로 복당했지만, 2007년 제17대 대선을 앞두고 다시 탈당해 이회창 후보 지지 선언을 하고 자유선진당에 입당하였다. 이윤수 전 의원도 2002년 안동선과 함께 탈당했고, 2007년 제17대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후보 지지에도 동참하였다. 송천영 전 의원은 1992년 민주당을 탈당, 국민신당 창당에 참여했다가 그해 11월에는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으며, 1997년에는 이회창 후보 불가론을 주장하며 신한국당을 탈당하였다. 그 뒤 2000년에는 민주당에 공천 신청을 했고, 2002년 12월엔 이인제를 따라 민주당을 다시 탈당해 자민련에 입당하였다. 송 전 의원은 2007년 대통령 후보 경선 때는 다시 한나라당 대전시당 고문직을 맡아 이명박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다. 송 전 의원은 또한 2007년 강창희에게 불법 정치자금 3000만 원을 건넸다가 돌려받은 혐의로 기소돼 징역 1년과 추징금 3000만 원을 선고받고 구속됐던 전력도 있다. 이 밖에 이날 회견을 한 조한천, 이희규, 반형식 전 의원 등은 지난 2004년 혹은 2008년 총선에서 이미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했던 인사들이었다.


이들 영입 인사들은 이날 기자 회견에서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과는 각을 세워 치열하게 싸웠지만, 그 딸인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고심 어린 결단을 꼭 알아달라"며 "이번 결심을 하는데 정말 고심이 많았다."라고 하였으며, 김무성은 이를 두고 "감동의 정치"라고 말했다.[224][226]


2012년 10월 25일에 있었던 이인제의 입당도 이른바 철새 영입 논란을 일으켰다.[227] 한국일보 사설은, 국민대통합이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득표에 도움이 된다면 전력을 따지지 않고 영입하는 것은 새누리당의 이미지를 추락시키는 등의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비판했다.[22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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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유산

김정란 상지대학교 교수는 박근혜 의원이 '독재자의 딸'인 것이 '본질적인 문제'라고 주장하였다. "박근혜를 인정하는 것은, 박정희를 완전히 복권시키는 일이며, 그것은 수십 년에 걸친 고통스러운 민주화의 역사적 의미를 완전히 무로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후광에 대해서는 "박근혜가 아버지의 유산을 단호하게 정리하지 않고, 계속 그 신화를 누리려고 하는 한, 박근혜는 박근혜가 아니라, 박정희와 육영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여자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진보적 여성주의의 전망에 대해 "박근혜 지지는 순진한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작동할 확률이 거의 없다"며 "합리적 정책 개발이 아니라 지역감정을 이용해 정치적 기반을 쌓았다"며 일축했다. 오히려 "우리 사회를 지역주의의 망령 속으로 되돌아가게 할 것이며, 박정희 시대에 대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역사적 판단에 종지부를 찍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염려했다.[229]


언론인 서화숙은 한국일보 칼럼에서 박근혜를 박정희의 유산을 세습하려는 대선 후보로 규정하였다. 그는 박근혜가 '5.16 군사 반란'과 유신 독재에 대한 상식적 판단을 거부한다고 주장하였고, 인혁당 사건을 두고 '두 개의 재판 결과가 있다'고 말한 것은, 일제 때 독립운동가를 처형한 재판도 인정한다는 말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그 자체로 공직에서 물러나야 마땅할 망언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도 박근혜의 옹호자들은 박정희의 잘못을 덧씌우지 말라고 한다면서, 박정희의 딸이라는 모습을 걷어내면 상식 없는 망언하는 정치가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230]


한편, 가족 집권 혹은 2세 집권이라는 관점에서 박근혜 후보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박명림 연세대학교 교수는, 미국의 조지 부시(조지 H. W. 부시-조지 W. 부시), 아르헨티나의 페론(후안 페론-에바 페론-이사벨 마르티네스 데 페론), 4대 가문이 27년을 통치한 일본(요시다 시게루-기시 노부스케-하토야마 이치로-후쿠다 다케오), 3대에 걸쳐 집권한 그리스(요르요스 파판드레우 (1888년)-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요르요스 파판드레우 (1952년)) 등의 사례를 예로 들며, 현대사에서 가족 집권이나 2세 집권은 최악의 성적표를 보여왔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통한 정권 교체가 필수적인 이유는 앞선 통치의 오류에 대한 교정의 필요성 때문인데, 가족 집권은 앞 통치의 극복, 즉 선친 부정이라는 근대 공화주의의 근본정신을 부정한다면서, 오류를 인정하지도 교정하지도 못함으로써 계속적인 퇴보를 반복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231]


2012년 12월, 미국의 언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대한민국의 대선 소식을 전하면서 박근혜를 '독재자의 딸'로 소개했다. WSJ은 "박 후보는 1960~1970년대 한국을 통치했던 군 출신 독재자 박정희의 딸"이라며 "이전 선거에선 적어도 한 명의 후보는 박 후보가 당선되면 나라가 다시 독재로 회귀할 거라 경고했었다"고 전했다.[232] 또한 뉴욕타임스와, AP통신도 박근혜의 당선 소식을 전하며 '독재자의 딸(dictator’s daughter)'이라고 표현했다.[233]


이러한 점 때문에 박근혜는 박근혜 본인의 행적으로 평가받지 못하고 그 아버지인 박정희의 행적으로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박정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지지를 받지만 박정희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비난을 당하고 있다.


이명박과의 관계

2007년 대선 이전에 있었던 경선에서 박근혜는 이명박과 경쟁하며 갈등을 겪어왔다. 경선 당시 박근혜 진영은 이명박이 전과 14범이라는 주장을 하거나,[234] 위장전입 문제도 파헤쳐[235] 이명박은 이 때문에 국민들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236] 이러한 갈등은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지속되어 왔다. 친박계 의원들의 한나라당 공천 탈락에 대하여 박근혜는 "국민도 속았고 나도 속았다"라는 말을 하여 파장을 일으켰으며,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과 관련한 촛불파동때는 재협상을 요구했고, 2009년 용산 참사 때는 경찰의 강경진압을 비판하였으며,[237] 한나라당에 의해 미디어법 개정 추진 당시에도 박근혜가 "개정안에 반대표를 던질 것"이라는 말을 던지는 등[238] 정책 문제에 대한 시각차이와 개인적인 갈등들이 복합적으로 남아있었다.


2009년 4월 7일 박근혜 전 대표는 기자들과 만나 이상득 의원의 정치 개입 논란에 대해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나"라며 "이번 사건은 정치의 수치"라고 정면 비판하였다.[239]


그러다가 2009년 이명박이 내놓은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박근혜의 반대론과 대하여 2010년 2월 9일 이명박은 "세계와의 전쟁에서 이기려면 힘을 모아야 한다"면서 "잘되는 집안은 강도가 오면 싸우다가도 멈추고 강도를 물리치고 다시 싸운다. 강도가 왔는데도 너 죽고 나 죽자 하면 둘 다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며 '강도론'에 비유하였다. 그러자 박근혜는 다음 날 "집안에 있는 한 사람이 마음이 변해가지고 갑자기 강도로 돌변하면 그때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이명박과 친이계를 강도에 비유하며 정면으로 반박하였다.[240] 청와대는 "박근혜에게 한 말이 아니고 원론적인 부분을 말한 것인데 박근혜가 과민 반응했다"며 선후관계를 파악하지 않고 대통령을 폄하했다는 이유로 박근혜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요구하였으나, 박근혜는 "(발언이) 문제가 있으면 있는대로 처리하면 될 것 아니냐"며 사과를 거부하였다.[241] 그러던 과정에서 청와대가 박근혜를 '한나라당 전 대표'가 아닌 '박근혜 의원'으로 호칭을 바꾼 데 대해 친박계 의원들은 "전면전에 돌입하자는 것"이라며 크게 반발하며 이동관의 사퇴까지 요구하였다.[242] 또한 친이계 정두언 의원은 "대통령한테 막말까지 하는 것을 보니까 자신이 마치 대통령이 다 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며 박근혜를 비난했다.[243] 이렇게 둘의 사그라들지 않는 갈등에 대해 중앙일보는 '경선과 대선을 거치며 둘 사이에 큰 불신이 생겼으며, 이명박도 박근혜와의 화해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고 있다'고 분석하였다.[244]


2010년 8월 22일 이명박과 박근혜의 회동이 11개월만에 성사되었다. 95분동안 진행된 회담은 보좌관도 없이 완전 비공개로 진행되었으며 회담 내용들은 거의 공개가 되지 않아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동아일보는 "李-朴회동 '깜짝쇼 찔끔 공개' 국민 무시다"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대통령이 여당의 실력자를 만나는 것은 중요한 국정 행위다. 그런데도 비밀 회동 방식을 택하고, 더구나 회동 결과를 청와대가 당당히 발표하지 않고 박 전 대표 측이 '찔끔 공개'한 것은 '그들만의 정치'"라며 비판했다.[245] 조선일보는 명지대 교수의 말을 인용하며 "김정일을 만나는 것도 아닌데 여권을 대표하는 두 지도자가 국민을 상대로 정치를 해야지 개인끼리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라며 비공개 회담은 음모론을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246]


국회에서 세종시 수정안이 폐기되고 원안이 통과되고 나서 한동안 박근혜와 친이계와의 갈등은 잠시 가라앉았다. 그러나 2010년 말부터 한나라당은 개헌 논의를 시작했는데 차기 대통령 후보 지지율 1위였던 박근혜는 개헌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친이계와의 갈등이 다시금 드러나기 시작했다. 2011년 2월까지 한나라당이 추진한 개헌 논의 대부분은 친이계가 주도하였으며 그 중심에는 이재오가 있었다. 이재오는 박근혜가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이에 대해 "대통령이 다 된듯이 행동한다"며 비판하기도 하였다.[247]


정수장학회, 육영재단 관련 비판

 정수장학회, 육영재단, 부일장학회, 영남대학교, 문화방송, 부산일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박근혜의 부친 박정희가 부일장학회를 강탈하여 정수장학회를 세운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부일장학회를 국가에 헌납하는 과정부터가 비판의 대상으로, 이와 관련하여 박근혜는 부일장학회의 헌납 과정에 문제가 없었다고 주장했으나, 부일장학회의 설립자 김지태의 장남 김영구가 '아버지가 수갑을 찬 상태로 운영권 포기각서에 서명하고 도장을 찍는 모습'을 옆에서 목격했다며 이는 헌납이 아닌 강탈이고, 정수장학회는 정치적 장물이라고 주장했다.[248]


이후의 행적 역시 비판의 대상으로, 부일장학회의 재산을 국고에 귀속시켜야 했음에도 이를 이용하여 정수장학회, 육영재단을 설립하여 재산을 은닉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겉으로는 공익으로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이를 사유화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는데, 실제 박근혜는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김영삼은 정수장학회와 육영재단을 '부정축재의 수단'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249]


2007년 5월 29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부일장학회는 박정희 정권에 강제헌납된 것으로 결론내리고 재산을 원소유주에게 돌려주라고 정부에 권고했다. 이에 박근혜는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권고를 무시한 채, "공익법인화한 정수장학회를 다시 사회환원하라는 것은 정치 공세"라고 반박하였다. 하지만 이런 발언에 대해 '그렇다면 그들 주장대로 공익법인인 육영재단을 두고, 박근혜의 형제들끼리 싸우는 이유가 무엇이냐'며 박근혜의 인식과 그 가족의 행태에 대한 비판도 끊이지 않고 있다. 또한 육영재단이 소유한 영남학원의 정관에는 '교주 박정희'라고 명시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공법인이라는 박근혜의 변명과 배치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앞서 2005년 언론노조 정수장학회 공동대책위는, 정수장학회의 문화방송 주식, 부산일보 주식, 영남대, 부동산 등 그 재산을 최소 1조원이라고 추산했으며, 많게는 10조원에 이를 수도 있다고 보았다.[250]


기타

박근혜의 재산은 2010년 4월 기준 건물 19억 7천 7백만원, 자동차 등 8천 1백 90만원, 예금 1억 2백 59만 6천원, 도합 21억 6천 1백 49만 6천원이다.[251]

진보 진영에서는 "독재자의 딸이며, 이명박 대통령보다 더 보수적이며, 콘텐츠가 부족한 감성형 지도자"로 평가한다.[164]

일부 야당 의원들은 미디어법 이후로 그를 기회주의자로 평가한다.[252]

미디어법에 대해서 반대를 표명했고, 일부 수정된 미디어법을 찬성하여 다시 한번 박근혜의 영향력을 확인했다. 하지만 미디어법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로 그의 원칙주의는 깨졌고 지지자들에게도 큰 비판을 받았다.[253]

2007년 대선 이후로 박근혜는 차기 대선 후보 지지율 1위를 내준적이 한 번도 없으나 2011년 9월 이후로 정치권을 강타한 '안철수 열풍'에 힘입어 차기 대선 후보 여론조사에서 안철수 59.0%, 박근혜 32.6%로 안철수가 압도적인 지지율을 나타내면서 '박근혜 대세론'이 끝났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하였다.[254]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서울대생들이 대선 후보들에 대해 평가한 책을 냈다. 서울대생들은 박근혜 의원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밝은 점은 이용하고 어두운 면은 책임지려 하지 않는 것 같다며 아버지의 과오를 인정하고 책임의식을 가져야 아버지의 굴레를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 밖에도 국가와 결혼한 애국자란 이미지가 있지만 서민의 삶은 잘 모르고 국민과 소통 및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주며, 수첩공주라는 별명처럼 사전에 계획된 멘트만 하는 등 거부감을 준다고 평가했다. 또한 박근혜 의원의 자기 비전과 위기 대처 능력, 젊은 층과의 소통 능력 등에 의문이 든다는 평가도 있었다.[124]

2012년 7월 1일, 프레시안과 원지코리아가 정치부 기자 222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박근혜는 '차기 대통령으로 적합한 인물'에서 문재인과 김두관에 이어 약 18%의 지지율로 3위를 기록하였으며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후보'를 묻는 질문에서는 약 35%의 압도적인 비율로 1위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결과에 대하여서는, 과연 대통령이 되었을 때 민주적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255] 윤여준 전 장관은 조사 결과에 대하여 정치부 기자들은 실상을 보는 위치에 있다면서 대통령이 되어선 안 될 후보 1위로 꼽혔다면 이는 심각하게 생각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윤 전 장관은 또한 박 전 위원장은 당 운영 방식 등을 보면 공공성에 대한 의식과 능력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당을 사유화하고 1인 지배체제를 만든다는 경쟁자들의 비판에 대해 아니라고 하기 어렵다고 말하였다.[256]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4·2 재보궐선거 국회의원(대구 달성군) 15대 한나라당 61.34% 34,271표 1위 달성군 국회의원 당선

제16대 총선 국회의원(대구 달성군) 16대 한나라당 61.4% 37,805표 1위 달성군 국회의원 당선

제17대 총선 국회의원(대구 달성군) 17대 한나라당 70.18% 45,298표 1위 달성군 국회의원 당선

제18대 총선 국회의원(대구 달성군) 18대 한나라당 88.57% 50,149표 1위 달성군 국회의원 당선

제19대 총선 국회의원(비례대표) 19대 새누리당 42.8% 9,130,651표 비례대표 11번 비례대표 국회의원 당선

제18대 대선 대통령 18대 새누리당 51.6% 15,773,128표 1위 대한민국 대통령 당선

논란과 의혹

 이 부분의 본문은 박근혜에 대한 비판입니다.


박근혜 (2009년)

최태민과의 내연관계 의혹

1989년 무렵부터 최태민과 박근혜의 내연관계 설이 시중에 돌았고, 이는 그대로 그해 10월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보고서를 통해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고되었으며, 2016년 11월 시중에 알려졌다. 1989년 10월 당시 대한민국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최태민의 동향을 파악해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고한 최태민 관련 보고서를 제출했다.[257] 그러나 이는 철저하게 함구되었고, 2016년 11월 4일 조선일보의 폭로로 알려지게 되었다.[257]


그러나 1998년 최태민 보고서에서 "최태민과 내연의 관계로 동거하고 있다."는 구절을 보도했다가 삭제하였고[258], 미디어오늘은 바로 온라인판 기사에 실린 사진에서는 해당 문장이 삭제돼 의문을 자아냈다고 보도했다.[258] 최태민은 다른 목사에게 '박근혜와 나는 영의 세계 부부이지, 육신의 부부는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다.[259][260] 한때 최태민을 만났던 전기영 목사는 최태민에게 박근혜와의 관계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최씨가 ‘내가 나이가 있는데…’라고 반문하더라. 나이도 많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인 것 같았다. 다만 ‘박근혜와 나는 영의 세계 부부이지, 육신의 부부는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261]


사생아 존재 여부 의혹

2007년 대선 직전 그에게 최태민과의 사이에서 숨겨둔 사생아 딸이 있다는 근거 없는 의혹이 여러 번 제기되었다.[262][263] 공식적으로는 미혼으로, 이전에도 그의 사생아 의혹이 여러 번 제기되었으나 2007년 대선을 계기로 공개적으로 공론화되었다.


박근혜가 최태민과의 사이에서 부적절한 관계였고 그 사이에 숨겨둔 사생아 아들 또는 딸이 있다는 의혹은 시중의 소문을 넘어 정치권으로도 전달되었다. 2007년 인사 검증 때도 이 문제가 집중 도마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그는 7월의 한나라당 인사 검증 때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한 검증위원이 고(故) 최태민 목사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묻자 '숨겨둔 아이'가 나오면 DNA 검사까지 받겠다고 했다.[264] 그는 "내게 애가 있다면 데리고 와도 좋다"며 "DNA 검사까지 해 주겠다[263]"며 자신에게 숨겨둔 자식이 있다는 일부 주장도 강력 부인했다.[262]


한편 인사검증회에 참여한 어느 참관인으로부터 "독신인데 저출산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자 그는 "사실 저도 결혼을 하고 싶었지만 사람 운명이 생각하지 않은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265] 숨겨둔 자녀가 아들이라는 설, 딸이라는 설 등의 소문은 무성했으나 근거는 밝혀지지 않았다.


정치 자금 6억원 논란

2007년 당시, 1979년 10.26 사태 직후 전두환으로부터 6억 원을 받은 사실이 논란거리가 되었다.[266] 1980년 박근혜와 그의 형제들 앞으로 6억 원의 돈이 지급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후 전 합수본부장에게서 9억원을 받은 뒤 김재규 사건 수사 격려금으로 3억 원을 되돌려 주었다는 것에 대한 의혹이 여러 번 제기되었다.[267] 이 돈은 박근혜와 그의 두 동생에게만 지불되었다. 그리고 액수도 6억 달러 설, 9억 달러 설 등이 제기되어 왔으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전두환의 자금을 받았다는 주장은 2002년 무렵하고 그가 당 대표로 있을 때에도 누군가에 의해 유포되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박근혜는 언급을 회피해 왔다. 2007년의 인사 청문회에서 이 문제가 다시 언급되었다. 이에 대해 박근혜는 '9억 원이 아니라 처음부터 6억 원을 받았다. 유자녀 생계비 명목으로 받았고 돌려준 것은 없다. 전 합수본부장의 심부름으로 왔다는 사람이 만나자고 해서 청와대 비서실에 갔더니 '이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쓰다 남은 돈이다. 생계비로 쓰라'고 전해 줘서 감사하게 받아 나왔다.[267]'며 생계유지비로 받았다고 말했다. 그가 전두환에게서 9억을 받았다, 6억을 받았다는 등의 의혹으로만 제기되어 오던 것이 2007년의 인사검증회에서 그가 시인함에 따라 사실로 확인되었다.[268]


박근혜가 청문회에서 자금을 받은 것과 액수를 밝힘으로써 의혹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더불어 당시의 6억원은, 당대 최고의 부동산으로 꼽히던 은마아파트를 30채 가량(1978년 31평형의 분양가가 2,090만원) 구매할 수 있었던 거액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269] 그러나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윤호중은 이를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박 전 대표가 전두환으로부터 받은 돈이 9억 원이 아니라 6억 원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을 빼고는 하나도 새롭게 검증된 것이 없는 청문회였다.[270]"는 것이다.


성북동 주택 취득 과정 의혹

그에게 제기되었던 의혹 중의 하나는 성북동 주택을 취득한 경위였다. 이는 그가 한나라당 대표로 재직할 때에도 제기되었다. 박정희의 신당동 사저와 같은 것으로 여겨졌으나, 2007년의 대통령 후보자 검증 청문회에 이르러 다시 언급되었다. 일각에서는 신당동 사저와 성북동 박근혜 자택을 오인하였으며 박정희 내외의 비극적인 죽음에 가려져서 묻혀졌으나 2007년 대선을 전후해 누군가에 의해 인터넷에 퍼지면서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성북동 주택은 기업인 신기수가 그에게 공짜로 주었다. 그런데 박 후보는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에게서 성북동 주택을 증여받은 것과 관련해 탈세 가능성이 제기되었다.[268] 2007년 인사검증회 당시 "성북동 주택 신기수씨가 무상으로 줬나" 하는 의혹에 대해 그는 "아버지 유품 보관할 장소로 쓰라며 대가없이 주었다"고 대답했다.[267] 또한 일부 언론으로부터 5공화국 때인 1982년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이 성북동 주택을 무상으로 줬다는 의혹도 있었다.[267]


한편 그는 성북동 사저는 사사로운 청탁 목적은 아니라고 해명한 바 있다. 그는 "나는 부모님이 사시다가 남기신 유일한 재산인 신당동으로 이사를 왔다. 부모님 유품을 정리해야 하는데 집이 너무 좁았다. 이런 사정을 알고 아버지와 인연이 있던 신 회장이 성북동에 집을 마련해 '유품을 보관할 장소가 있으니 이사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서 받아들였다.[267]"고 반론하였다.


최태민 의혹

1970년대부터 최태민 목사는 그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그 과정에서 최태민과 그 일가들의 비리 행위를 묵인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박근혜가 육영재단, 정수장학회 등을 운영하면서 그를 보좌하였던 최태민의 비리 문제는 오랫동안 도마에 올랐다. 7개의 이름과 6번 결혼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구국선교단, 구국봉사단 총재 등으로 박 후보를 보좌하면서 박 후보의 이름을 팔아 이권에 개입한 의혹을 받았다.[271] 박근혜의 정계 입문 이후 이 문제는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 후보 검증 청문회 당시 '중정 조사에 의하면 최 목사는 공사 수주, 장군 승진, 국회의원 공천 명목 등으로 돈을 받은 단서가 포착되는 등 비리 건수가 40여 건 된다고 한다. 알고 있었느냐[267] 는 질문에 대하여서도 "아버지가 나와 중정 부장, 최 목사, 관계되는 사람들을 불러 직접 조사를 하실 때 어떻게 횡령하고 사기를 쳤는지 답하라고 했다. (비리) 내용이 막연했다. 실체가 없는 얘기로 끝나서 아버지가 대검에서 조사하여 보고 문제가 있으면 법적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하셨다. 아버지는 친척을 감옥에 보낼 정도로 엄격하신 분이다. 그 쪽에 가서도 별다른 일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정권들이 나를 봐주거나 돌볼 상황이 아니었다. 굉장한 매도의 기간이었다. 잘못이 있었다면 굉장히 시끄러웠을 거다.[267]"라고 반박하였다.


또한 '검증위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최초에 중정은 최 목사를 구속하자고 건의했고, 검찰이 조사하여 보니 중정 조사보다 훨씬 많은 비리가 나왔다. 결국 최 목사가 봉사단 총재에서 물러나는 선에서 이 문제가 일단락됐다. 그런데도 최 목사의 비리 혐의가 불확실하다고 할 수 있느냐[267]'는 질문에 대하여서도 "대검에서 엄청난 비리가 나와서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처리해야지 왜 덮나. 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세무조사, 검찰 조사가 있었는데 왜 법적 조치를 안 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267]"고 반박하였다.


최태민과 그 가족들의 비리 행위나 비위 의혹에 대하여 박근혜는 최태민이 모함을 받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2007년의 청문회 당시 '최 목사가 지금도 결백하고 모함받고 있다고 생각하나.'[267] 라는 질문에 대하여 "내가 아는 한도에서는 의혹의 실체가 없지 않나 생각한다. 현실이 그러니까. 앞으로 실체가 나온다면 내가 모르던 일이니까 굉장히 유감스럽고 잘못된 일이다.[267]"라고 말하였다.


2007년의 청문회 초반 고 최태민 목사에 대한 질문이 집중되면서 박 전 대표의 목소리 톤이 약간 높아졌다.[265] 다른 검증위원이 최태민과의 자녀 존재 여부를 묻자 박근혜는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에 김명곤 한나라당 검증위원은 "최 목사와 관련된 질문만 나오면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냐"고 꼬집자 박 전 대표는 작심한 듯 "아기가 있다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얘기까지 나온다. DNA 검사라도 해줄 테니 애를 데려오라"며 언성을 높였다.[265]


정윤회 의혹

일본 산케이 신문 전 서울지국장 가토 다쓰야에 의해 세월호 침몰 사고당일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오랜 비서였던 정윤회와 밀월 중이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혐의가 없는 것으로 인정되었고, 이 건으로 명예훼손 수사를 받았던 가토 다쓰야는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인정되었지만 최종적으로 언론의 자유 보장 차원에서 무죄방면되었다.[272][273][274][275]


산케이 신문 가토 다쓰야 박근혜 대통령 명예훼손사건

 이 부분의 본문은 산케이 신문 지국장 명예훼손 혐의 사건입니다.

일본 산케이 신문 전 서울지국장 가토 다쓰야가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 사고당시 7시간 동안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이 오리무중이었다며, 박근혜 대통령의 오랜 비서였던 정윤회와 남녀애정핵각 중이었다고 의혹을 제기하였다. 이에 한국의 독도사랑회 등이 검찰에 명예훼손혐의로 고발하였고 한국 검찰은 수사를 시작하였다. 2015년 12월에 한국 법원은 명예훼손 혐의는 인정되나 다만 비방의 목적은 없다고 하며 최종 무죄방면하였다. 가토 다쓰야는 재판 후 '왜 나는 한국에 이겼나. 박근혜 정권과의 500일 전쟁'이라는 책을 2016년 1월 29일 산케이 신문 1면 보도 후 발간하여 '한국은 중세국가다'. '한국의 법은 대통령과 국민감정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된다' '한국과는 가치관을 공유할 수 없다' 등 한국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았다. 같은 날인 29일에 한국에서도 가토의 책을 반박하는 책이 발간되었다.


육영재단 운영

2007년 7월의 한나라당 인사검증 청문회 당시 박근혜는 육영재단 관련 의혹과 관련, 형제 간에 갈등이 불거진 것이 아니냐는 추궁이 잇따르자 "실체가 없는 일인데 자꾸 말이 커진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265] 육영재단 재산 착복 의혹[267] 이 제기되자 그는 '보수·판공비 일절 안받아… 전횡 소문도 사실무근.[267]'이라며 반박하였다. 박후보의 동생인 근령씨는 육영재단 운영을 놓고 대립한 문제가, 지만씨는 미국 유학과정에서 영남대 공금 전용 문제는 오래도록 도마에 올랐다.[271]


인사 청문회 당시 영남대, 육영재단 관련 의혹 중 "영남투자금융이 육영재단에 기부금을 출연한 것이 부적절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에는 "얘기를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265] 말 실수도 있었다. 박 전 대표는 영남대 의혹에 관한 질문에 "대구대와 청구대가 합치는 과정에서 학교를 맡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책임"이라고 답했다. 그는 이어 잠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병철 전 회장"으로 정정했다.[265] '82년 10월부터 90년 11월까지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했는데 보수와 판공비를 받은 적이 없는가.[267]'라는 질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육영재단 사람들이 이사장직을 맡아 유지를 이어야 한다고 건의해 책임을 느끼고 이사장을 맡았다. 보수와 판공비를 받지 않았다. 일주일에 2, 3번 출근했다.[267]"라고 답했다.


(박근혜가) '이후 육영재단 이사장을 퇴임한 이유와 관련, 최 목사와 딸이 박 전 대표와의 친분을 과시하고 전횡을 일삼아 직원들이 반발한 것이 원인이라는 말이 있다.[267]'는 의혹에 대해 "어머니 기념사업을 육영재단에서 같이 했고, 당시 최 목사가 기념사업 일을 도왔다. 구조조정에 불만을 품은 직원들의 소요가 있었고, 오해가 있어서 '최태민 물러가라'는 식으로 데모가 있었지만 최 목사나 딸이 결코 육영재단 일에 관여한 적이 없다.[267]"고 반박하였다. 또한 육영재단의 운영 과정에서 최태민이 개입했다는 의혹 역시 제기되었다. 최 목사가 육영재단 고문의 직함을 갖고 이사장인 박 전 대표가 결재를 하기 전에 먼저 결재를 할 정도로 재단 운영에 깊이 관여했다.[267] 는 의혹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다. 최 목사가 고문직을 하지 않았고, 최 목사가 연로하여 고문으로 예우해 부른 것뿐이다.[267]"라고 반박하였다.


한편 "박근혜가 박근령의 육영재단 이사장 해임의 배후 역할을 했다"는 내용의 비방글이 동생 박근령의 남편이 적성한 것으로 드러났다.[276] 이 문제로 신동욱 교수가 징역 1년 6개월형에 확정되는 등[277] 논란의 여지가 존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 관련 의혹

영남대학교 재단 이사장 시절의 전횡과 정관 1조에 '교주 박정희'라는 조항을 삽입한 것 역시 오래도록 문제시되어 왔다. 영남대 이사장 시절 전횡 의혹[267] 과 영남대 재단이사가 된 지 1년 후에 학교법인 영남학원 정관 1조에 '교주(校主) 박정희'라는 표현이 삽입된 사건[267] 에 대하여 "67년 영남대 설립 시 이사 전원이 서명한 결의문에 '교주 박정희'라는 글귀가 들어 있었다. 당시 이사 한 사람이 그것을 정관에도 넣자고 제의하여 이사회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나도 이사회에 참여하였고 찬성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267]"며 아무 문제가 없다고 답하였다.


한편 영남대학교 재단 재산 착복에 대한 의혹도 제기되었다. 86년 당시 영남대학교 대학병원장 모씨의 해외출장비 명목으로 280여만원이 동생 지만씨의 항공료 등으로 지급됐고 병원장은 주치의 자격으로 박지만 씨와 미국에 함께 갔다.[267] 는 의혹이 제기된다. 그에 대해 "그때는 몰랐지만 검증위 소명자료를 준비하면서 발견해 동생에게 알아 봤더니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267]"며 반박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영남대 병원장은 소환되지 않았다.


영남대 재단 비리에 육영재단을 끌어들이지 않았느냐는 의혹도 제기되어 왔다. '영남대 재단이 전액 출자한 영남투자금융회사는 육영재단이 발간하는 어린이 잡지 <보물섬> 등에 장기간 광고하고 광고비로 2,700여만 원, 기부금도 1억 3,000여만 원 지급했는데 알고 있었느냐.[267]'는 질문에 대해서도 "육영재단이 공익재단이기 때문에 영남투자금융뿐 아니라 다른 데서도 기부금을 받을 수 있다. 영남투자금융에 강요한 적은 없다. 경영진에서 판단해서 한 것으로 안다.[267]" 또, 영남대 재단 4인방으로 거론되는 김 모, 조 모, 손 모, 곽 모 씨 등을 직접 임명하지 않았느냐[267] 는 인사 의혹에 대해서도 "(자신은) 결재하지 않았다. K 전 총장이 확인서를 써 줬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이명박 캠프에서 정책자문단으로 일하고 대구 지역에서 사조직을 만들어 운영하는 분이다. 확인서가 신빙성 있는 자료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는다.[267]"며 결백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영남대 재단 운영 과정에서의 의혹은 야당 인사들에 의한 공격 표적의 하나가 되었다. 한편 박근혜가 영남대 재단 이사장 시절 운영에 개입하였다는 확인서를 제출한 김기택 전 영남대 총장은 박근혜로부터 이명박 당시 대통령 후보자 측 참모라는 역공을 받기도 하였다.[271]


정수장학회에 대한 의혹과 해명

그가 한나라당 대표로 있을 때부터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겸임하였을 때 탈세했다는 의혹[267]'도 줄곧 제기되어 왔다. 이에 대해 2007년 청문회에서 그는 '납세 의무가 있는지 몰라… 후에 퇴직금 정산하여 납부하였다.[267]'고 해명하였다. '95~2005년 정수장학회 이사를 지냈으므로 강제 헌납에서 자유롭지 않다. 설립 당시 이런 문제 알았나.[267]'는 질문에 대해 그는 "당시 상황은 정확히는 모른다. 그러나 강제 헌납 주장에 대하여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이 아닌 것을 입증할 자료를 장학회가 가진 것으로 안다.[267]"고 해명하였다.


또한 '적절한 시기에 재단 운영과 관련해 국가 헌납 등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용의가 있나.[267]'는 질의가 있었으나 그는 "공익재단에 대하여 이래라 저래라 할 입장 안 된다. 이사회가 결정할 문제다.[267]"라며 이사회가 처리할 문제라는 말을 하였다.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겸임하였을 때의 섭외비 탈루 의혹도 제기되었다. '수억 원의 섭외비에 대한 세금을 탈세하였다는 보도가 나오자[267] 그는 "매년 감독 관청에 보고했으나 세금 의무가 있는지 몰랐다. 법이 바뀌어 소득세를 내야 했으나 실무진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누락되었다. 퇴직금을 중간 정산해 납부하였다.[267]"고 해명했다. 98년 국회의원 당선 이후 그는 정수장학회의 이사장 및 비상근 이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267] 그러나 이때 급여를 받아 횡령이라는 주장이 나왔다.[267] 그는 "출근을 안 한 게 아니라 일주일에 2, 3번 가서 결재하였고, 행사가 있으면 가는 등 이사장 일을 다 하였다. 횡령은 동의할 수 없다.[267]'고 해명하였고, 법원은 이에 대한 조사 결과, 박근혜의 손을 들어주었다.


한편 2014년 5월 15일 정수장학회와의 관련성을 허위보도했다며 박근혜 대통령이 경향신문과 해당기자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및 정정보도 청구 소송에서 서울남부지법은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재판부는 "기사의 일부 내용이 허위여서 박 대통령의 명예가 훼손된 사실이 인정된다"며 "500만원을 지급하고 정정보도문을 게재하라"고 판시했다. 경향신문은 제18대 대선 당시인 2012년 8월 28일 '새누리 후보 박근혜 뒤집어보기: 도덕성과 과거를 묻는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박 대통령이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연간 정수장학회 장학금의 10%를 보수로 받았고, 정수장학회에 대한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 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의 결정이 나오자 이사장직을 사퇴했다는 내용 등을 보도했었다..[278]


5.16에 대한 관점 논란

5.16 군사 정변의 주역이던 박정희의 차녀였으므로 그가 5.16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그가 정계에 입문한 1998년 이후 줄곧 이슈가 되어 왔다.


1990년 잡지 인터뷰에서 박근혜는 5·16과 4·19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박 전 대통령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역사 의식에 의문이[267] 제기되자 2007년 5.16을 구국의 혁명이라고 본다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2007년 7월의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그는 '박 전 대통령 유지 계승' 역사의식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는 "5·16은 구국(救國)의 혁명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때 상황이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남북대치 상황에서 잘못하면 북한에 흡수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혁명 공약에도 기아 선상에 헤매는 국민을 구제한다는 얘기가 나온다.[267]"는 것이다. 다만 10월 유신에 대해서는 판단유보를 내렸다. 5.16 뒤의 유신시대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267] 는 질문에 "역사에 판단을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다만 유신시대에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헌신하고 고통받은 분들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항상 죄송하게 생각한다.[267]"고 답하였다. 이 때문에 야당 인사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한명숙 전 총리는 박근혜 전 대표가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5.16을 '구국의 혁명'이으로 규정한 데 대해 '망언'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한명숙은 2007년 7월 19일 "그가 5.16 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이라고 미화한 것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국토방위에 전념하고 있는 69만 국군 장병들에 대한 모독이자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민주 영령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279] 한명숙은 이어 "아직도 박정희 쿠데타 정권에 고문당하고 살해당한 분들의 유가족이 서러움과 한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며 "고(故) 장준하 선생의 부인을 만나 고개를 조아렸던 때가 언제라고 또다시 독재의 유전자를 드러내냐"고 비난하였다.[279] 한 전 총리는 자신은 총리 인사청문회에서 유신시절 자신을 고문하고 투옥했던 가해자들을 용서했다고 말했지만 "박 후보의 망언은 이처럼 유신독재의 피해자들이 내미는 용서와 화해의 손을 뿌리치고 피해자들의 가슴에 다시 한 번 못을 박는 잔인한 짓"이라고 언론에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279]


2012년 7월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박근혜의 5·16의 역사관에 대한 논란이 또다시 불거졌다.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박근혜는 "5.16은 당시 상황에서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하여 과거 '구국(救國)의 혁명' 발언 당시의 생각과 변함이 없음을 밝혔고 이후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 합동 토론회에서 오마이뉴스의 여론조사를 인용[280] 해 "제 발언에 찬성하는 분이 50%를 넘었다"고 말하면서 사회적으로도 5·16 찬반 논쟁을 일게 했다. 그러나 박근혜를 칠푼이라 비하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 상황을 빗대 "박근혜, 대통령 되기엔 결격 사유 있다"며 혹평[281] 하였으며, 박근혜가 언급한 것과 반대의 여론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고[282][283][284] 박근혜의 지지율은 다소 하락하면서[285] 박근혜는 "5·16은 정상적인 게 아니다"며 다소 입장을 바꾸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 토론회에서 임태희 후보의 5·16 관련 질문에 "과거에 묻혀 사시네요"라며 반박하는 등[286] 역사관 논란을 피하려 하였다.


2002년 복귀 당시 2억 원 수수 의혹과 해명

2004년 2월 대선자금 수사에서 박 전 대표가 복당 과정에서 2억 원을 수수한 사실이 드러났고, 이 돈이 복당의 대가인지 의혹[267] 이 제기되었다. 그는 이것을 선거 활동비 명목이라고 해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당에 들어올 때 중앙선대위 의장을 맡았는데 당 사무총장으로부터 2002년 11월 26일과 12월 7일 1억 원씩을 선거 활동비 명목으로 받았다. 한나라당 입당 조건으로 받은 것 아니다. 미래연합을 운영하면서 빚진 것 있었지만 이 돈에는 전혀 손대지 않았다.[267]'라고 해명하였다.


공직선거법 위반 발언 논란

2015년 6월 25일 박근혜는 국무회의에서 "정치적으로 선거 수단으로 삼아서 당선된 후에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라고 언급하였다. 이는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을 겨냥해서 한 말로, 특정인의 낙선을 유도하는 발언이기 때문에 공직선거법에 위배된다는 조국 (1965년) 교수와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비판이 있었다. 이와 관련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보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287][288]


타임 아시아판 표지 모델

2012년 12월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이라는 뜻의 'The Strongman's daughter'라는 기사 제목과 함께 [289]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의 2012년 12월 17일자 아시아판 표지 모델로 선정되었다.[290] 이에 대해 박근혜가 소속된 정당인 새누리당은 2012년 12월 7일 'The Strongman's daughter'이란 기사 제목이 '강력한 지도자의 딸'이라고 보도자료를 발표하였다. 이후 타임은 'The Strongman's daughter'의 인터넷판 기사 제목을 '독재자의 딸'이라는 뜻의 'The Dictator's Daughter'으로 수정하였다.[291][292]


세월호 선장 비판에 대한 월스트리트 저널의 의문 제기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고에 대하 박근혜는 세월호 선장을 '선장이 먼저 탈출한 것은 살인과도 같은 행태'라고 비난하였다. 이에 대해 월스트리트 저널은 '박근혜 대통령, 세월호 선장 비난한 것은 옳았나?'라는 기사를 실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기사에서 '하지만 세월호를 운항한 선장이 승객에게 즉각 대피 명령을 내리지 않은 이유는 차가운 물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어서였다', '대통령은 정부가 이번 사고를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위해 선장과 승무원들을 공개석상에서 규탄하고 있다는 비판에 부딪쳤다'라는 의견을 전하였으며, 월스트리트 저널은 자사의 사이트를 통하여 박근혜가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에게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승무원들에게 살인과도 같은 행태를 저질렀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여론조사를 실시하였고, 응답자 중 73%의 참여자가 '옳지않다'라고 응답하였다.[293]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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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 소식을 접하였을 때, 슬퍼하기에 앞서 "휴전선은 이상 없습니까?"라고 말하였고, 지지자들은 이를 높이 평가한다.[294]

2007년 1월 3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긴급조치 위반 사건 분석 보고서를 공개한 것을 두고 박근혜는 "나에 대한 정치공세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인혁당 사건에 관해서는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는 안타깝다"면서도 "지난번에도 법에 따라 한 것이고 이번에도 법에 따라 한 것인데, 그러면 법 중 하나가 잘못 된 것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또한 인혁당 사건과 긴급조치 위반사건 등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는 동의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앞으로 역사와 국민이 평가할 것"이라며 "그리고 정부가 지금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해서도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말했다.[295]

2007년 8월에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며 "27년 전 광주시민이 겪은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며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만들어 광주의 희생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이명박 선대위의 장광근 대변인은 "영화 관람 한 번으로 '호남의 한' '역사 의식 부재'를 한 번에 뛰어넘겠다는 박근혜 후보. 그의 화려한 광주 1박 2일 외출은 80년 광주정신의 모독일 뿐"이라며 비판했다. 또 "왜 광주에서는 지난 번처럼 '5.16은 구국의 혁명'이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나"라며 "DJ를 들먹이며 지역감정을 부추기려는 그의 다급함이 안타깝기조차 하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진수희 선대위 대변인은 "반역사, 반민주적 유신시대의 퍼스트 레이디 5년은 부끄러워할 일이지, 결코 자랑할 일은 아니다"라며 "유신시절 '퍼스트 레이디' 5년을 공으로 돌리고, 국정경험으로 포장하는 박 후보의 역사관과 정치철학은 무엇인가"라고 비난했다. 이에 박근혜 선대위의 김재원 대변인은 "'박근혜 대통령 정부'에서 이념, 지역, 세대 간의 갈등과 대립은 과거의 역사로 묻힐 것"이라며 "'박근혜 정부'는 고향과 출신을 가리지 않고 천하의 인재를 골고루 쓰는 '대탕평 인사'로 국민적 에너지를 하나로 뭉치는 '희망정부' '드림정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가지 특별히 주목할 점은, 박 후보에 대한 연설회장의 뜨거운 열기와 성원"이라며 "특정 후보가 압도적으로 앞서간다는 말이 얼마나 허풍이었는지 드러났다. 박풍이 호남에서도 일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황석근 선대위 공보특보도 "오직 박근혜만이 동서화합, 정권교체, 호남발전의 희망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다시 한번 공포된 날"이라며 "박근혜는 언제나 빛을 몰고 다니는 후보, 어디서나 빛을 발하는 후보, 어둠과 부패를 몰아내는 후보라는 것이 유감없이 드러났다"고 강조했다.[296]

김대중 前 대통령은 "박근혜가 '동서화합'의 적임자"라며 높이 평가하면서, 자서전에 "세월이 흘러 그의 맏딸 박근혜가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의 대표였다. 박 대표는 뜻밖에 아버지 일에 대해 사과하였다. '아버지 시절에 여러가지로 피해를 입고 고생하신 데 딸로서 사과 말씀 드립니다.' 나는 그 말이 참으로 고마웠다. 박정희가 환생하여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라며 박근혜와의 일화를 공개하였다.

2007년 경제공화당 허경영 총재가 자신이 발행한 일간지 《Lotto 복권뉴스》와 인터뷰에서 "박근혜와 약혼하였다" "박근혜와 결혼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퍼뜨리자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였다.[297] 2008년 대법원은 허 총재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였으며, 허 총재는 "내가 인기가 많아지니까 한나라당 언론대책위원회에서 허경영이 잡아라! 해서 고소가 시작되었고 나중에야 박근혜 의원이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고 주장하였다.[298]

학력

서울장충초등학교 졸업

성심여자중학교 졸업

성심여자고등학교 졸업

서강대학교 공학부 전자공학과 학사

명예 박사 학위

1987년 중국 문화 대학 명예 문학 박사

2008년 KAIST 명예 이학 박사

2008년 부경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2010년 서강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2014년 드레스덴 공과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2016년 파리 제6대학교 명예 이학 박사

가계도

박성빈 박동희 박재홍

박재선

백남의 박무희 박재석 박용철

박재호 박용수

박귀희

박상희 박준홍

박영옥 김종필

박계옥 김용태

박금자 반기언

박설자 김희용

박한생

박재희

김호남

박재옥 한병기

박정희

박근혜

육영수

박근령 신동욱

박지만 서향희



조부 박성빈 (朴成彬, 1871년 ~ 1938년)

조모 백남의 (白南義, 1872년 ~ 1949년)

부 박정희, 대통령 (朴正熙, 1917년 ~ 1979년)

모 육영수 (陸英修, 1925년 ~ 1974년)

자 박재옥 (1937년 ~ ) - 김호남 소생

형부 한병기 - 前 국회의원, 前 주캐나다 대사. 現 설악관광케이블카 회장

매 박근령 (朴槿令, 1954년 ~ ) - 現 육영재단 이사장

제 박지만 (朴志晩, 1958년 ~ ) - 現 기업 EG 회장

올케 서향희 (徐香姬, 1974년 ~ ) - 변호사

장질 박세현 (朴世現, 2005년 ~ )

종형 박재홍 - 1백부 박동희의 장남, 前 동양철관 회장, 前 국회의원

종형 박재석 - 2백부 박무희의 장남, 前 국제전기기업 회장.

종형 박준홍 - 3백부 박상희의 장남, 前 대한축구협회장, 前 국회의원

종자 박영옥 - 3백부 박상희의 장녀

종형부 김종필 - 前 국회의원, 前 국무총리

고모 박귀희 (은지원의 조모)

내종형 은희만

내종형수 김성아 - 가수, 릴리시스터즈 멤버

내종질 은지원 - 가수

이모 육인순 (陸寅順, 1912년 ~ 1972년)

이종자 홍소자 (洪昭子, 1939년 ~ ) 前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이종형부 한승수 (韓昇洙, 1936년 ~ ) 前 국회의원, 前 장관, 前 부총리, 前 국무총리, 前 유엔총회 의장

경력

1980년 한국문화재단 이사장

1980년 ~ 1988년 영남대학교 이사

1982년 ~ 1990년 육영재단 이사장

1994년 ~ 2005년 정수장학회 이사장

1998년 4월 3일 ~ 2000년 5월 29일 제15대 국회의원(달성군)

2000년 5월 30일 ~ 2004년 5월 29일 제16대 국회의원(달성군)

2000년 ~ 2002년 새누리당 부총재

2002년 5월 ~ 2002년 11월 한국미래연합 대표최고위원

2004년 3월 23일 ~ 2006년 6월 16일 새누리당 대표

2004년 5월 30일 ~ 2008년 5월 29일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달성군)

2007년 새누리당 제17대 대통령 경선후보

2008년 5월 30일 ~ 2012년 5월 29일 제18대 국회의원(달성군)

2011년 12월 19일 ~ 2012년 5월 15일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2012년 5월 30일 ~ 2012년 12월 10일 제19대 국회의원(비례대표)

2012년 새누리당 제18대 대통령 후보

2013년 2월 25일 ~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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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센스 승인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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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다 하는 유튜브 광고 수익 나도한번 해볼까 해서 시작했는데 이건 뭐 애드센스 승인에서 계속 떨어집니다. 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지 도통 감이 안잡힙니다. 블로그도 만들고 영상편집도 배우고 나름 노오력 해서 올리고 있는데 영 승인이 나질 않네요.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누가 좀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단 글을 쓰는게 중요하대서 글을 쓰고는 있는데 혹시 복사 붙여넣기 하는것도 문제될까바 내용도 없는 글을 무작정 쓰고 있는데 아 쓰다보니 더이상 무슨말을 더 써야될지 모르겠습니다. 1000자 이상 써야된다고 하고 어미에는 ~다~까로 끝나야된다고하고 문단 나누는 엔터도 많이 치면 안된다고 하고 아 뭐 되게 까다롭습니다. 이쯤 썼으면 됐을꺼라생각합니다. 이제 사진 한두장 올리고 글 마치면 되는거라 생각합니다. 설마 이 글 읽는분은 없을꺼라 생각합니다. 뭔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하야고 하시겠지만 말 길게 하려다 보니 생각한다고 말하는것이 나쁘지 않다고 보여져서 그렇게 쓰게되었습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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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되는 100가지 명언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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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되는 100가지 명언 모음

힘이되는 100가지 명언 모음 

세상사는데 도움이되는 명언들 힘이되는 명언 용기를 주는 명언 위로가되는 명언 좋은명언 글귀 모음 100가지  자주 보면 좋을듯 하여 선별 했습니다.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키케로 




산다는것 그것은 치열한 전투이다. -로망로랑 



하루에 3시간을 걸으면 7년 후에 지구를 한바퀴 돌 수 있다. 
-사무엘존슨 



언제나 현재에 집중할수 있다면 행복할것이다. -파울로 코엘료 



진정으로 웃으려면 고통을 참아야하며 , 나아가 고통을 즐길 줄 알아야 해 -찰리 채플린





직업에서 행복을 찾아라. 아니면 행복이 무엇인지 절대 모를 것이다 -엘버트 허버드



신은 용기있는자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 -켄러 




행복의 문이 하나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우리를 향해 열린 문을 보지 못하게 된다  - 헬렌켈러





피할수 없으면 즐겨라 - 로버트 엘리엇



단순하게 살아라. 현대인은 쓸데없는 절차와 일 때문에 얼마나 복잡한 삶을 살아가는가?

-이드리스 샤흐



먼저 자신을 비웃어라. 다른 사람이 당신을 비웃기 전에 

- 엘사 맥스웰 








먼저핀꽃은 먼저진다  남보다 먼저 공을 세우려고 조급히 서둘것이 아니다 

- 채근담 



행복한 삶을 살기위해 필요한 것은 거의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절대 어제를 후회하지 마라 . 인생은 오늘의 나 안에 있고 내일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L.론허바드 

어리석은 자는 멀리서 행복을 찾고, 현명한 자는 자신의 발치에서 행복을 키워간다

 -제임스 오펜하임



너무 소심하고 까다롭게 자신의 행동을 고민하지 말라 . 

모든 인생은 실험이다 . 더많이 실험할수록 더나아진다 

- 랄프 왈도 에머슨





한번의 실패와 영원한 실패를 혼동하지 마라  -F.스콧 핏제랄드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피할수 없으면 즐겨라 -로버트 엘리엇



절대 어제를 후회하지 마라. 인생은 오늘의  내 안에 있고 내일은 스스로 만드는것이다. 

-L론허바드 



계단을 밟아야 계단 위에 올라설수 있다, -터키속담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 -앙드레 말로





좋은 성과를 얻으려면 한 걸음 한 걸음이 힘차고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테







행복은 습관이다,그것을 몸에 지니라 -허버드







성공의 비결은 단 한 가지, 잘할 수 있는 일에 광적으로 집중하는 것이다.

- 톰 모나건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으면 자신감이 생긴다 -찰스다윈







평생 살 것처럼 꿈을 꾸어라.그리고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아라. 

- 제임스 딘







네 믿음은 네 생각이 된다 . 네 생각은  네 말이 된다. 네말은 네 행동이 된다 

네행동은 네 습관이된다 . 네 습관은 네 가치가 된다 . 네 가치는 네 운명이 된다 

- 간디 








일하는 시간과 노는 시간을 뚜렷이 구분하라 . 시간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매순간을 즐겁게

보내고 유용하게 활용하라. 그러면 젋은 날은 유쾌함으로 가득찰것이고 늙어서도 후회할 일이 

적어질것이며 비록 가난할 때라도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갈수있다

 - 루이사 메이올콧









절대 포기하지 말라. 당신이 되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면, 

그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라. 당신 자신에게 기회를 주어라. 스스로가 형편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래봐야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다. 목표를 높이 세워라.인생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 

- 마이크 맥라렌






1퍼센트의 가능성, 그것이 나의 길이다.

-나폴레옹







그대 자신의 영혼을 탐구하라.

다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그대 혼자의 힘으로 하라.

그대의 여정에 다른 이들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 이 길은 그대만의 길이요,

 그대 혼자 가야할 길임을 명심하라. 

비록 다른 이들과 함께 걸을 수는 있으나 다른 그 어느 누구도 

그대가 선택한 길을 대신 가줄 수 없음을 알라.

-인디언 속담 









고통이 남기고 간 뒤를 보라! 고난이 지나면 반드시 기쁨이 스며든다. -괴테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 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법정스님 -버리고 떠나기 







꿈을 계속 간직하고 있으면 반드시 실현할 때가 온다. -괴테 





화려한 일을 추구하지 말라.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재능이며, 

자신의 행동에 쏟아 붓는 사랑의 정도이다. -머더 테레사





마음만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반드시 실천하여야 한다.

-이소룡





흔히 사람들은 기회를 기다리고 있지만 기회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잡히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기 전에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일에 더 열중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안창호





나이가 60이다 70이다 하는 것으로 그 사람이 늙었다 젊었다 할 수 없다. 

늙고 젊은 것은 그 사람의 신념이 늙었느냐 젊었느냐 하는데 있다.

-맥아더 





 만약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한다면 우리들은 우리자신에 깜짝 놀랄 것이다. 

-에디슨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물어야 한다건성으로 묻지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 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 

법정스님- 산에는 꽃이 피네 





행복은 결코 많고 큰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고마워 하고 만족할 줄 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은 단순함과 간소함에 있다 

법정스님 - 홀로사는 즐거움 에서 



물러나서 조용하게 구하면 배울 수 있는 스승은 많다. 

사람은 가는 곳마다 보는 것마다 모두 스승으로서 

배울 것이 많은 법이다. 

-맹자



눈물과 더불어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자는 인생의 참다운 맛을 모른다. -괴테 







진짜 문제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것은 절대로 물리학이나 윤리학의 문제가 아니다.

-아인슈타인



해야 할 것을 하라. 모든 것은 타인의 행복을 위해서,

동시에 특히 나의 행복을 위해서이다.

-톨스토이





사람이 여행을 하는 것은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행하기 위해서이다. -괴테 




화가 날 때는 100까지 세라. 최악일 때는 욕설을 퍼부어라. -마크 트웨인



재산을 잃은 사람은 많이 잃은 것이고 

친구를 잃은 사람은 더많이 잃은 것이며

용기를 잃은 사람은 모든것을 잃은 것이다

-세르반테스 







돈이란 바닷물과도 같다. 그것은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말라진다. 

-쇼펜하우어 












이룰수 없는 꿈을 꾸고 이길수 없는 적과 싸우며

이룰수 없는 사랑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잡을수 없는 저 하늘의 별도 잡자 

-세르반테스 









고개 숙이지 마십시오. 세상을 똑바로 정면으로 바라보십시오. -헬렌 켈러







고난의 시기에 동요하지 않는 것, 이것은 진정 칭찬받을 만한 뛰어난 인물의 증거다. 

-베토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 생떽쥐베리 









행복의 한 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닫혀진 문을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 

-헬렌 켈러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진정한 부자이고,

탐욕스러운 사람은진실로 가난한 사람이다.

-솔론







성공해서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알랭







곧 위에 비교하면 족하지 못하나,아래에 비교하면 남음이 있다.

-명심보감







그대의 하루 하루를 그대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라

 - 호라티우스 







자신을 내보여라. 그러면 재능이 드러날 것이다. 

- 발타사르 그라시안 















자신의 본성이 어떤것이든 그에 충실하라 . 자신이 가진 재능의 끈을 놓아 버리지 마라. 본성이 이끄는 대로 

따르면 성공할것이다 -시드니 스미스 











당신이 할수 있다고 믿든 할수 없다고 믿든 믿는 대로 될것이다.- 헨리 포드 









단순하게 살라. 쓸데없는 절차와 일 때문에 얼마나 복잡한 삶을 살아가는가? 

이드리스 샤흐







당신이 인생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 그사실을 잊지마라 . 지금까지 당신이 만들어온 의식적 

그리고 무의식적 선택으로 인해 지금의 당신이 있는것이다 .

 - 바바라 홀







지금이야 말로 일할때다. 지금이야말로 싸울때다. 지금이야말로 나를 더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때다 

오늘 그것을 못하면 내일 그것을 할수있는가- 토마스 아켐피스









모든것들에는 나름의 경이로움과 심지어 어둠과 침묵이 있고 , 내가 어떤 상태에 있더라도 나는 그속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운다

-헬렌켈러 







작은 기회로 부터 종종 위대한 업적이 시작된다 

-데모스테네스 







인생이란 학교에는 불행 이란 훌륭한 스승이 있다. 그 스승 때문에 우리는 더욱 단련되

는 것이다. -프리체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사람들로도 가득하다 

- 헨렌켈러 





도저히 손댈 수가 없는 곤란에 부딪혔다면 과감하게 그 속으로 뛰어들라 . 

그리하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가능해진다.

















용기있는 자로 살아라.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용기 있는 가슴으로 불행에 맞서라. -키케로







최고에 도달하려면 최저에서 시작하라.

-P.시루스





내 비장의 무기는 아직 손안에 있다 .그것은 희망이다 - 나폴레옹









문제는 목적지에 얼마나 빨리 가느내가 아니라 그 목적지가 어디냐는 것이다.

-메이벨 뉴컴버





한 번 실패와 영원한 실패를 혼동하지 마라.

-F.스콧 핏제랄드





인간의 삶 전체는 단지 한 순간에 불과하다 . 인생을 즐기자 - 플루타르코스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으리 -셸리 







일하여 얻으라 . 그러면 운명의 바퀴를 붙들어 잡은것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







당신의 행복은 무엇이 당신의 영혼을 노래하게 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 낸시 설리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결정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오직 나 자신뿐이다.

-오손 웰스-













먹고 싶은것을 다 먹는 것은 그렇게 재미있지 않다 . 인생을 경계선 없이 살면 기쁨이 덜하다 . 

먹고싶은대로 다 먹을 수있다면 먹고싶은 것을 먹는데 무슨 재미가 있겠나 - 톰행크스





인생을 다시 산다면 다음번에는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리라 - 나딘 스테어 





절대 어제를 후회하지 마라 . 인생은 오늘의 나 안에 있고 내일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L.론허바드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엇기 위한 첫번째 단계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결정하는 것이다 

-벤스타인





가난은 가난하다고 느끼는 곳에 존재한다 .- 에머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아라 슬픈 날에 참고 견디라 .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것 모든건 하염없이 사라지나가 버리고 그리움이 

되리니 - 푸쉬킨 





문제점을 찾지 말고 해결책을 찾으라 - 헨리포드 



우선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를 자신에게 말하라 그리고 해야 할일을 하라 -에픽토테스





되찾을 수 없는게 세월이니 

시시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순간순간을 

후회 없이 잘 살아야 한다.

-루소 





인생에 뜻을 세우는데 있어 늦은 때라곤 없다 - 볼드윈 









도중에 포기하지 말라. 망설이지 말라. 최후의 성공을 거둘 때까지 밀고 나가자.

- 헨리포드 





네 자신의 불행을 생각하지 않게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베토벤 



우리는 두려움의 홍수에 버티기 위해서 끊임없이 

용기의 둑을 쌓아야 한다. 

-마틴 루터 킹 



직접 눈으로 본 일도 오히려 참인지 아닌지 

염려스러운데 더구나 등뒤에서 남이 말하는 

것이야 어찌 이것을 깊이 믿을 수 있으랴?

-명심보감-



이미끝나버린 일을 후회하기 보다는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지못한 것을 후회하라

- 탈무드



실패는 잊어라 그러나 그것이 준 교훈은 

절대 잊으면 안된다

-하버트 개서]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루이다 단 하루면 인간적인 모든 것을 

멸망시킬수도 다시 소생시킬수도 있다 

-소포클레스





성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는 고장입니다

당신은 계단을 이용해야만 합니다 

한계단 한계단씩 - 조 지라드 





길을 잃는 다는 것은 곧 길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동아프리카속담 



삶을 사는 데는 단 두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기적이 전혀 없다고 여기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여기는방식이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And

과일과 야채를 신선하게 유지하는 방법 18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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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나 찬장을 살펴보면 신선하지 않거나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것 같은 과일이나 채소를 본적 있으신가요? 까먹고 있다가 종종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데요. 이런 실수가 얼마나 자주 발생하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음식물쓰레기로 얼마나 많은 돈이 낭비되고 있는지 생각해야할 시점입니다. 해외 유수 언론의 기사를 참조로 "생활의달인이 밝히는 과일과 야채를 신선하게 유지하는 방법 18가지"를 소개합니다.



 

01. 보관하기 전에 아무것도 씻지 마세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 냉장고나 찬장에 보관하기 전에 과일과 채소를 씻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더러워진 것이 있으면 마른 천이나 티슈로 깨끗이 닦아주세요. 보관전에 먼저 씻으면 썩거나 부패를 방지하는 자가방어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02. 과일과 채소는 건조한 환경을 선호한다.


수분은 곰팡이가 생기는 것을 촉진합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좋은 방법은 과일이나 채소를 담는 용기 안에 종이 타월을 놓는 것입니다. 과도한 수분을 흡수하여 제품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합니다.






03. 아보카도를 올바르게 저장하는 방법


익히지 않은 아보카도는 두꺼운 종이 봉지에 넣거나 신문에 싸서 익을 때까지 실온에 보관해야합니다. 그런 다음 비닐 봉지에 넣고 냉장고에 보관하세요.






04. 냉장고에 과일과 채소를 넣지 마세요.


피망, 오이, 토마토는 실온에서 보관해야 합니다. 오이와 토마토는 끈적 거리는 반면, 피망은 냉장고에 보관하면 탄력이 없어집니다. 과일과 야채는 숙성될 때까지 냉장고에 보관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훨씬 더 빨리 썩을 것입니다.






05. 바나나 줄기를 랩으로 감싼다.


바나나를 냉장고에 보관하면 빨리 검어지면서 맛이 떨어집니다. 실온에 보관하는 것이 가장 좋은데요. 줄기는 비닐랩으로 감싸주세요.






06. 얇게 슬라이스하거나 채썬 야채는 물에 보관하세요.


당근이나 샐러리와 같이 썰었거나 껍질을 벗긴 채소를 냉장고에 실제로 오래 동안 보관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소량의 물을 용기에 넣어주세요.






07. 냉장고의 따뜻한 칸에 과일과 채소를 저장하세요.


온도가 낮을수록 과일과 채소의 아로마와 신선함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오랫동안 더 맛있게 이용하려면 냉장고에 온도가 약간 높은 칸에 보관하세요.






08. 과일과 채소의 특정 종류는 함께 저장하면 안된다.


특정 종류의 과일과 채소는 일단 숙성되면 에틸렌을 적극적으로 배출하기 시작합니다. 바나나, 살구, 멜론, 배, 자두, 망고, 토마토가 이런 종류에 포함되는데요. 반면 사과, 가지, 수박, 감자, 호박, 당근, 브로콜리 등은 에틸렌에 민감합니다. 두 종류를 가깝게 두면 빠른 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이 두 종류를 서로 구분해서 보관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09. 양파와 감자는 별도의 장소에 보관한다.


양파와 감자를 한 곳에 보관하면 싹이 트기 시작하고 먹을 수 없게 됩니다.






10. 마늘과 양파는 어두운 곳에 보관


마늘과 양파의 가장 친한 친구는 어둠입니다. 마땅한 장소가 없다면 종이 봉투에 여러 개의 작은 구멍을 내고 그 안에 보관하세요. 어두운 곳에 보관할 수록 더욱 더 신선하게 먹을 수 있습니다.






11. 햇빛에 보관하면 감자가 손상된다.


태양이 비치는 곳에 감자를 직접 보관해선 안됩니다. 감자는 썩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건조하고 어두운 장소나 나무 또는 플라스틱 상자 및 바구니에 보관하는 것이 좋습니다.






12. 감자와 함께 사과를 보관하세요.


한 두 개의 사과를 감자와 함께 보관하면 감자가 오래 동안 신선한 상태로 유지됩니다.






13. 아스파라거스는 꽃처럼 보관하세요.


아스파라거스는 꽃이 가득한 잔을 준비 할 때 물이 든 유리에 보관해야합니다. 그렇게 하면 더 오랫동안 신선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14. 브로콜리와 꽃양배추는 수분을 보충해준다.


브로콜리는 줄기를 담수에 넣고 윗부분을 젖은 수건으로 덮어서 보관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물은 정기적으로 바꿔줘야 하며 수건은 자주 물에 적셔야합니다. 꽃양배추는 젖은 수건이나 환기를 위해 구멍이 뚫린 비닐랩에 싸야합니다.






15. 상온에서 보관하는 야채는 공기의 흐름이 필요합니다.


야채를 찬장에 숨겨두면 안됩니다. 그런 조건에서 보통 더 빨리 망가질 것입니다. 대신 통풍이 잘되는 나무 상자 또는 플라스틱 상자에 보관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실제로 공기 흐름이 원할한 곳은 어디서나 보관할 수 있습니다.






16. 셀러리를 알루미늄 호일로 감싼다.


셀러리는 알루미늄 호일에 싸서 냉장고에 보관하면 신선하게 오래 보관할 수 있습니다. 비닐랩으로 보관하면 맛과 모양이 안 좋아집니다.






17. 토마토는 꼭지가 위로 해서 보관한다.


줄기 주변은 토마토의 가장 섬세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부패하기 시작하는 부위인데요. 꼭지가 위로 향하게 보관하세요.






18. 비닐 봉지에 보관하면 포도가 신선합니다.


포도는 빨리 분해되지 않으며, 비닐 봉지나 플라스틱 케이스에 넣고 냉장고에 넣으면 육즙이 많고 신선합니다. 또몽땅 뭉쳐서 보관하지 마세요. 바닥에 있는 것들이 부서지기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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